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그린 르네상스의 화가이자 발명가.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己흙 | 甲나무 | 壬물 |
| ? | 未양 | 辰용 | 申원숭이 |
운명 앱 풀이 — 「배려가 깊고 꼼꼼해서, 둘레를 가꾸는 일에서 삶의 뜻을 찾는 분이에요.」
양력 1452-04-24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0 · 흙 3 · 쇠 1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불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할아버지의 공책에 적힌 새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새벽 3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때 쓰던 옛 달력의 날짜입니다. 태어난 시각까지 알려진 것은 공증인이던 할아버지 안토니오 덕분입니다. 공증인은 계약서 같은 중요한 문서를 확인해 주는 사람인데, 할아버지는 집안의 큰일을 문서 공책 뒤쪽 빈칸에 적어 두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피에로는 대대로 공증인을 낸 집안의 젊은이였고, 어머니 카테리나는 가난한 집 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둘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레오나르도는 결혼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난 아이로 자랐습니다.
요람에 내려앉은 솔개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1457년의 세금 기록을 보면 그는 늦어도 그 무렵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피렌체에 있었고, 그는 삼촌 프란체스코와 가까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그 뒤로도 여러 번 결혼해, 레오나르도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복동생이 열 명 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습니다.
훗날 그는 노트에 새가 나는 법을 적다가, 자기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함께 적었습니다. 아기였을 때 솔개 한 마리가 요람으로 날아와 꼬리로 그의 입을 벌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기억인지 꿈같은 상상인지는 지금도 의견이 갈립니다.
학교 대신 공방
결혼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난 아이는 그 시절 대학에 가거나 의사, 법률가가 되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가 속한 공증인 조합도 그런 아이를 받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정식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일상의 이탈리아 말로 읽기와 쓰기, 셈을 겨우 배웠습니다. 학자들이 쓰던 라틴어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열네 살 무렵 그는 피렌체로 가서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습니다. 베로키오는 그 무렵 피렌체에서 가장 이름난 화가이자 조각가였습니다. 공방에서 그는 그림과 조각뿐 아니라 설계도 그리기, 금속 다루기, 석고 뜨기, 가죽과 나무 다루기, 기계 만지는 법까지 배웠습니다. 사람 몸의 근육과 힘줄을 그리는 공부도 이때 시작했습니다.
스승이 붓을 놓았다는 이야기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예수의 옷을 든 왼쪽의 어린 천사는 레오나르도가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16세기의 전기 작가 바사리는 제자의 솜씨가 너무 뛰어나 베로키오가 붓을 내려놓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다만 이 뒷이야기는 꾸며진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바사리는 이런 이야기도 남겼습니다. 한 농부가 둥근 방패를 들고 와 그림을 그려 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젊은 레오나르도는 그 방패에 불을 뿜는 괴물을 그렸는데, 너무 무시무시해서 아버지는 농부에게 다른 방패를 사 주고, 아들의 방패는 피렌체의 상인에게 금화 100닢에 팔았다고 합니다.
1472년 스무 살에 그는 화가 조합에 이름을 올려 정식 화가가 되었습니다. 날짜가 적힌 그의 가장 오래된 그림은 1473년에 펜으로 그린 아르노강 골짜기의 풍경입니다.
말 머리 모양의 악기를 들고
그는 피렌체에서 맡은 큰 그림들을 끝내지 못한 채 1482년 밀라노로 떠났습니다. 밀라노를 다스리던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도시를 지키고 성을 공격하는 온갖 기계와 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길게 적었고, 그림도 그릴 줄 안다는 말은 끝에 덧붙였습니다. 손에는 말 머리 모양으로 만든 은빛 현악기를 들고 갔습니다.
밀라노에서 그는 스포르차 집안을 위해 잔치의 꾸밈과 행렬을 준비하고, 대성당 지붕의 설계 경연에 나무 모형을 냈습니다. 가장 큰 일은 루도비코의 아버지를 기리는 거대한 말 동상이었습니다. 그는 말의 모형을 완성하고 청동을 붓는 방법까지 꼼꼼히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1494년 11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동상에 쓸 청동은 대포를 만드는 데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빠르게 바래 간 「최후의 만찬」
1495년부터 1498년까지 그는 밀라노의 한 수도원 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예수가 붙잡히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한 저녁,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한 바로 그 순간에 제자들이 놀라 술렁이는 모습입니다.
그는 벽화에 흔히 쓰던 튼튼한 방법 대신, 석고를 바른 바탕 위에 다른 물감을 칠하는 방법을 골랐습니다. 그 바람에 벽에는 곰팡이가 슬고 물감이 들뜨며 떨어졌습니다. 그림은 빠르게 상해, 100년이 채 안 되어 「완전히 망가졌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껏 가장 많이 베껴 그려진 종교화로 남았습니다.
도둑이자 거짓말쟁이라 적은 제자
1490년, 한 소년이 조수로 그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작은 악마」라는 뜻의 살라이라고 불렀습니다. 한 해 만에 레오나르도는 노트에 그를 「도둑, 거짓말쟁이, 고집쟁이, 먹보」라고 적었습니다. 돈과 물건을 적어도 다섯 번 훔쳐 갔고, 옷에 큰돈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살라이를 너그럽게 대했고, 살라이는 그 뒤로 30년 동안 그의 곁에 남았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새장에 갇힌 새를 사서 날려 보내곤 했고, 동물을 아껴 고기를 먹지 않았을 것으로도 짐작됩니다.
마흔이 넘어 시작한 라틴어
피렌체의 학자들은 라틴어를 모르는 그를 낮추어 보았습니다.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때 연습한 흔적이 지금도 노트에 남아 있습니다. 1490년대에는 수학자 루카 파촐리에게 수학을 배우며, 그의 책에 들어갈 입체 도형들을 뼈대만 남긴 모습으로 그려 주었습니다.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차지하자 그는 살라이와 파촐리를 데리고 베네치아로 피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배를 막는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1502년에는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 밑에서 군사 기술자로 일하며 이탈리아 곳곳을 다녔고, 보르자의 근거지인 도시 이몰라의 지도를 그려 그의 마음을 샀습니다.
끝내 손에서 놓지 않은 초상
1503년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리사 델 조콘도라는 여인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이 「모나리자」입니다. 「웃는 여인」이라는 뜻의 「라 조콘다」라고도 불리는 이 작은 그림을, 그는 늘그막까지 붙들고 고쳐 그렸습니다.
모나리자의 웃음은 입가와 눈가가 아주 옅은 그늘에 묻혀 있어, 정확히 어떤 웃음인지 짚어 낼 수 없습니다. 테두리를 연기처럼 흐리게 녹이는 이 그림법은 「레오나르도의 연기」라고도 불렸습니다. 바사리는 그 웃음이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신의 것처럼 보였다」고 썼습니다.
1504년 1월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 조각상을 어디에 세울지 정하는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이어 피렌체 시청의 큰 방 벽에 전투 그림을 맡았는데, 맞은편 벽은 미켈란젤로의 몫이었습니다. 이 그림도 빠르게 상해, 지금은 루벤스가 베껴 그린 그림으로만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507년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이복동생들과 다투어야 했습니다.
거울에 비춰야 읽히는 13,000쪽
그는 평생 날마다 노트를 적었습니다. 남은 것만 13,000쪽에 이릅니다. 장 볼 목록과 돈을 빌려 간 사람의 이름이 있는가 하면, 새의 날개를 본뜬 날틀과 물 위를 걷는 신발 설계도도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물, 바위의 결, 아기와 동물, 사람의 얼굴과 감정까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 그렸습니다.
대부분의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꾸로 써서, 거울에 비춰야 바로 읽힙니다. 왼손잡이였던 그에게는 그쪽이 더 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노트를 책으로 펴낼 생각이었다고 적었지만, 살아서는 끝내 내지 않았습니다. 왜 내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죽은 뒤 노트는 멜치에게 넘어갔다가 여기저기 흩어졌고, 지금은 영국 윈저성의 왕실 도서관, 루브르 박물관, 밀라노의 도서관 같은 곳에 나뉘어 있습니다. 과학 노트 가운데 개인이 가진 것은 「레스터 사본」 하나뿐인데, 빌 게이츠가 가지고 있으며 해마다 한 번씩 세계 여러 도시에서 보여 줍니다.
칼과 밀랍으로 그린 몸속
그는 피렌체와 밀라노, 로마의 병원에서 허락을 받아 사람의 몸을 직접 갈라 보았습니다. 근육과 뼈가 어떻게 힘을 주고받는지, 심장과 핏줄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240장이 넘는 그림으로 남겼고, 어머니 배 속의 아기를 그린 가장 이른 과학 그림 가운데 하나도 그의 것입니다.
녹인 밀랍을 부어 뇌 속 빈 곳의 모양을 떴고, 유리로 큰 핏줄을 만들어 물에 풀씨를 띄워 피가 흐르는 길을 살폈습니다. 물건이 미끄러질 때 생기는 마찰의 법칙도 1493년 노트에 이미 적었지만, 이 역시 펴내지 않아 그 법칙은 1699년에야 다른 사람이 다시 찾아냈습니다.
수은을 바른 도마뱀
1513년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도마뱀에 수은을 묻힌 비늘을 붙여 사람들을 놀래 주었습니다. 교황이 그림을 맡겼지만, 그가 그림은 두고 새 칠을 만드는 데 먼저 매달리자 일을 거두어 갔습니다. 이 무렵 그는 처음으로 몸이 크게 아팠습니다.
힘든 시절,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왕의 곁, 클로 뤼세
1516년 3월 후원자 줄리아노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그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부름을 받아 제자 멜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왕은 자기 성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라는 저택을 내주었고, 자주 찾아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왕을 위해 기계 사자를 만들었습니다. 잔치에서 사자가 왕에게 걸어가 막대로 한 번 맞으면 가슴이 열리고 백합 꽃다발이 나왔습니다. 이 무렵 그의 오른손은 마비되어 있었지만, 왼손잡이였던 그는 일을 이어 갔습니다.
예순 명의 촛불
1519년 4월 23일, 그는 유언장을 썼습니다. 그림과 노트와 책은 제자 멜치에게, 포도밭은 살라이와 하인에게 반씩 남겼습니다. 1519년 5월 2일, 그는 클로 뤼세에서 예순일곱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사리는 왕이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고 썼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유언대로 촛불을 든 가난한 사람 예순 명이 그의 관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묻힌 교회는 1802년 헐렸고, 그의 유골은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년쯤 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세상에 다시 태어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운명 앱으로 본 다 빈치
운명 앱 풀이는 다 빈치를 「배려가 깊고 꼼꼼해서, 둘레를 가꾸는 일에서 삶의 뜻을 찾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꼼꼼하다」는 말에는 13,000쪽의 노트가 대답합니다. 장 볼 목록까지 적고, 말 동상 하나를 위해 청동 붓는 법까지 계획한 사람입니다. 「배려가 깊다」는 말은 새장의 새를 사서 날려 보내고, 몇 번이고 물건을 훔쳐 간 제자를 30년 동안 곁에 둔 모습과 겹칩니다. 다만 그 꼼꼼함 때문에 그는 많은 그림을 끝내지 못했고, 노트는 끝내 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