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한 이탈리아의 과학자.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丁불 | 丙불 | 甲나무 |
| ? | 未양 | 寅호랑이 | 子쥐 |
운명 앱 풀이 — 「타오르는 촛불처럼 조용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온기를 지닌 분이세요.」
양력 1564-02-25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2 · 불 2 · 흙 1 · 쇠 0 · 물 1 — 기운이 센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물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류트 연주가의 맏아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빈첸초는 이름난 류트 연주가이자 작곡가, 음악 이론가였습니다. 류트는 기타와 비슷한 옛 현악기입니다. 갈릴레오도 커서 솜씨 좋은 류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음악을 실험으로 따져 본 사람이었습니다. 팽팽하게 당긴 줄을 얼마나 세게 당기느냐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재 보았습니다. 갈릴레오는 아버지가 줄을 당기고 재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자연을 숫자로 재 보는 그의 버릇은 이 집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열 살 무렵 그는 먼저 이사 간 가족을 따라 피렌체로 갔고, 1575년부터 1578년까지 피렌체 근처의 발롬브로사 수도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사제가 될 생각까지 진지하게 했습니다.
성당의 샹들리에와 맥박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는 1580년 피사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수학자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벌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일부러 그를 수학에서 떼어 놓았습니다.
1581년, 그는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게 흔들릴 때도 작게 흔들릴 때도 한 번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맥박으로 그 시간을 재 보았고, 집에 돌아와 길이가 같은 추 두 개를 하나는 크게, 하나는 작게 흔들어 보았습니다. 두 추는 나란히 박자를 맞추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기하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내키지 않아 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의학 대신 수학과 자연을 공부하는 길로 돌아섰습니다.
단테의 지옥을 잰 젊은 강사
1586년, 그는 직접 만든 저울에 관한 작은 책을 냈습니다. 물속에서 무게를 달아 물건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알아내는 저울이었고, 이 책으로 처음 학자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지금 온도계의 조상이 되는 기구도 만들었습니다.
1588년에는 피렌체의 미술 학교에서 그림의 원근법과 명암을 가르쳤습니다. 같은 해에는 시인 단테가 『신곡』에 그린 지옥의 모양과 위치, 크기를 셈으로 따져 보는 강연을 두 번 했습니다. 이 무렵 사귄 화가 치골리와는 평생 벗으로 지냈습니다.
피사의 사탑 이야기
1589년, 그는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비비아니가 쓴 전기에는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기울어진 탑 위에서 같은 재료로 된 무게가 다른 공들을 떨어뜨려, 무거운 것이 더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틀렸음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갈릴레오 자신은 그런 실험을 했다고 적은 적이 없습니다.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이것이 실제로 한 실험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따져 본 생각 실험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는 탑이 아니라 논리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박했습니다.
동생의 빚과 돈 버는 발명
159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미켈란젤로를 돌보는 일이 그의 몫이 되었습니다. 동생도 류트 연주가였는데, 평생 형에게 돈 걱정을 안겼습니다. 아버지가 누이들의 시댁에 주기로 약속한 결혼 지참금을 제대로 나누어 내지 못했고, 음악 일로 여행을 다닐 때마다 형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1592년 그는 파도바 대학으로 옮겨 1610년까지 기하학과 기계학, 천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돈 걱정은 그를 실용적인 발명으로 이끌었습니다. 1594년에는 말의 힘으로 물을 퍼 올리는 펌프로 베네치아에서 특허를 받았고, 대포를 쏘는 사람과 땅을 재는 사람이 쓰는 셈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3배에서 30배로
1608년 네덜란드에서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보이게 하는 기구가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갈릴레오는 그 설명만 듣고 이듬해 3배로 보이는 망원경을 만들었고, 곧 30배까지 키웠습니다. 한동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망원경을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609년 8월 25일, 그는 베네치아의 지도자들 앞에서 망원경을 시연했습니다. 바다 멀리서 다가오는 배를 먼저 볼 수 있는 이 기구를 상인들이 사 갔고, 망원경은 그에게 쏠쏠한 부업이 되었습니다.
매끄럽지 않은 달
1609년 11월 30일, 그는 망원경을 달로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달이 흠 하나 없이 매끄러운 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달에는 산과 움푹 팬 구덩이가 있었고, 빛과 그림자가 지는 모양을 보고 그는 산의 높이까지 가늠했습니다.
그는 은하수도 들여다보았습니다. 뿌연 구름처럼 보이던 은하수는, 망원경으로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촘촘히 모인 것이었습니다.
목성 곁의 작은 별 넷
1610년 1월 7일, 그는 목성 옆에 한 줄로 늘어선 「너무 작아서 거의 보이지 않는 별 셋」을 보았습니다. 다음 날 밤, 그 별들은 자리를 바꾸어 있었습니다. 10일에는 하나가 사라졌는데, 그는 그것이 목성 뒤로 숨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3일에는 넷이 보였고, 15일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별들은 목성 둘레를 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오랜 믿음과 맞지 않는 발견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처음에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위성들에 앞으로 자기를 후원할 피렌체의 군주 코시모 2세와 그 형제들의 이름을 붙였고, 1610년 3월 『별의 전령』이라는 얇은 책으로 발견을 알렸습니다. 그해 그는 코시모 2세의 부름을 받아 피렌체로 돌아갔습니다. 훗날 천문학자들은 이 넷을 그의 이름을 따 「갈릴레이 위성」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달처럼 차고 기우는 금성
1610년 9월부터 그는 금성이 달처럼 초승달 모양에서 둥근 모양까지 차고 기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금성이 지구 둘레를 돈다면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금성은 해 둘레를 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에 검은 점이 있다는 것도 살폈습니다. 하늘은 완벽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시 금이 갔습니다. 토성의 고리는 처음에 토성 양옆에 붙은 별 둘로 보았다가, 나중에는 그것들이 사라진 듯 보여 크게 어리둥절해했습니다. 고리가 지구 쪽으로 옆면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1612년에는 해왕성을 보고도, 그것이 행성인 줄 모른 채 흐린 별 하나로 노트에 적어 두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지구가 움직인다는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614년 한 사제는 피렌체의 성당 설교에서 성경 구절을 끌어와 그를 비꼬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갈릴레오」라는 이름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뜻의 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1616년 2월, 교회의 조사 위원회는 해가 가운데 멈춰 있고 지구가 돈다는 생각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판정했습니다. 2월 26일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갈릴레오를 불러 그 생각을 버리고, 말로도 글로도 가르치거나 지키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그 뒤 십 년 가까이 그는 이 문제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바보처럼 보인 심플리치오
1623년, 그를 아끼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되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책을 썼고, 1632년 교회의 허락을 받아 『두 개의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를 냈습니다. 교황은 두 생각의 근거를 고르게 다루고 어느 한쪽을 편들지 말라고 부탁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지구가 가운데라는 쪽을 맡은 인물 심플리치오는 자꾸 자기 말에 걸려 넘어졌고, 그 이름은 이탈리아 말로 「얼간이」처럼 들렸습니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그가 교황을 비웃으려던 것은 아니며 반응에 그 자신도 놀랐다고 보지만, 가장 든든하던 후원자는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1633년 2월, 칠순을 앞둔 그는 로마의 종교 재판에 섰습니다. 그는 1616년 이후로 약속을 지켜 왔다고 끝까지 말했습니다. 마지막 심문에서는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고문하겠다는 위협까지 받았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6월 22일 내려진 판결에 따라 그는 지구가 돈다는 생각을 「버리고,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맹세해야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라는 형은 이튿날 집에 갇혀 지내는 벌로 바뀌었고, 그는 남은 생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대화』는 금지되었고, 앞으로 쓸 책까지 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맹세를 마친 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처음 글로 나온 것은 그가 죽고 한 세기가 지난 뒤였습니다.
딸이 대신 읽은 기도
그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채 함께 산 여인 마리나 감바에게서 난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혼인 밖에서 난 딸들이 시집가기 어렵다고 여겼고, 두 딸은 피렌체 근처 아르체트리의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을 보냈습니다. 맏딸 비르지니아는 「마리아 첼레스테」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1634년 그는 그 수녀원에서 가까운 아르체트리의 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판결은 그에게 3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뉘우침의 기도문 일곱 편을 읽으라고 했는데, 마리아 첼레스테가 교회의 허락을 받아 그 짐을 대신 졌습니다. 그 딸은 같은 해 4월 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이 먼 뒤에도
갇혀 지내는 동안 그는 40년쯤 전에 해 둔 운동과 물체의 튼튼함에 관한 연구를 정리해 『새로운 두 과학』을 썼습니다. 교회의 검열을 피해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나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를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라 부른 큰 까닭이 이 책입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썼습니다. 「철학은 우주라는 커다란 책에 쓰여 있고, 그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
1638년 그는 두 눈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찾아오는 손님을 맞았습니다. 1642년 1월 8일, 열과 가슴 두근거림 끝에 그는 일흔일곱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가락 하나와 350년
피렌체의 군주는 그를 산타 크로체 성당 한가운데, 아버지와 조상들의 무덤 곁에 묻고 대리석 묘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반대해, 그는 성당 복도 끝의 작은 방에 묻혔습니다. 1737년에야 성당 안으로 옮겨졌는데, 그때 손가락 셋과 이 하나가 떼어졌고, 그 손가락 하나는 지금 피렌체의 갈릴레오 박물관에 놓여 있습니다. 딸 마리아 첼레스테도 같은 성당에 그와 함께 묻혔습니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0년 만이었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갈릴레오
운명 앱 풀이는 갈릴레오를 「타오르는 촛불처럼 조용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온기를 지닌 분이세요」라고 풉니다. 「어둠을 밝힌다」는 말은 밤마다 망원경 앞에 앉아 목성의 작은 별 넷을 찾아낸 사람에게 잘 맞습니다. 그러나 「조용하다」는 말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반대하는 학자들을 날카로운 글로 몰아붙였고, 그 말투 때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온기는 오히려, 늙은 아버지 대신 기도문을 읽겠다고 나선 수녀원의 딸과의 사이에서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