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을 펼친 영국의 자연학자.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己흙 | 丙불 | 己흙 |
| ? | 未양 | 寅호랑이 | 巳뱀 |
운명 앱 풀이 — 「배려가 깊고 꼼꼼해서, 둘레를 가꾸는 일에서 삶의 뜻을 찾는 분이에요.」
양력 1809-02-12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2 · 흙 3 · 쇠 0 · 물 0 — 기운이 센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의사 집안의 다섯째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잉글랜드 서쪽의 작은 도시 슈루즈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로버트는 부유한 의사였고, 어머니 수재나는 웨지우드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다윈은 여섯 남매 가운데 다섯째였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은 모두 노예 제도를 없애자고 앞장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친할아버지 이래즈머스는 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생겨났다는 생각을 시처럼 풀어 쓴 책을 남겼습니다. 손자가 훗날 펼칠 생각의 씨앗이 이미 그 안에 조금 들어 있었습니다.
여덟 살 다윈은 벌써 자연을 관찰하고 이것저것 모으는 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해 1817년 7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듬해부터 다윈은 형과 함께 기숙 학교에 다녔습니다.
수술실에서 도망친 의대생
1825년 열여섯 살의 다윈은 형을 따라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윈에게 강의는 지루했고, 수술을 지켜보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는 공부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대신 다른 것을 배웠습니다. 남아메리카에서 노예로 살다 풀려난 흑인 존 에드먼스톤에게서, 날마다 한 시간씩 40번쯤 동물을 박제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바닷가에서 작은 바다 생물을 연구하던 교수를 거들었고, 1827년 3월 27일에는 굴 껍데기에서 나온 검은 알갱이가 거머리의 알이라는 것을 학생 모임에서 발표했습니다.
딱정벌레를 쫓던 신학생
의학 공부를 팽개친 아들에게 화가 난 아버지는, 1828년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보냈습니다. 시골 교회의 목사가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윈은 공부보다 말 타기와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낯선 짐승 고기를 먹어 보는 「대식가 클럽」에도 들었는데, 이 버릇은 평생 갔습니다.
이 무렵 육촌 형이 보여 준 나비 수집품에 반해 딱정벌레 모으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가 찾은 딱정벌레 몇 마리는 곤충 도감에 실리기까지 했습니다. 식물학 교수 헨슬로와는 늘 붙어 다녀서, 교수들 사이에서 「헨슬로와 함께 걷는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1831년 1월 마지막 시험에서는 178명 가운데 10등을 했습니다.
집에 와 있던 편지 한 통
1831년 8월 29일, 웨일스로 지질 조사를 다녀온 다윈이 집에 와 보니 헨슬로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아메리카 바닷가의 지도를 그리러 떠나는 배, 비글호에 함께 탈 자연학자 자리를 추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배는 4주 뒤에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시간 낭비라며 반대했습니다. 외삼촌이 아버지를 설득해 준 덕분에 다윈은 허락을 얻었고, 뱃삯도 집에서 대기로 했습니다.
뱃멀미와 함께한 5년
비글호는 1831년 12월 27일에 떠나 거의 5년 동안 바다를 돌았습니다. 배가 해안을 재는 동안, 다윈은 대부분의 시간을 땅 위에서 보냈습니다. 바위를 살피고, 동식물을 모으고, 보고 생각한 것을 꼼꼼히 적었습니다. 뱃멀미가 아주 심했지만, 배 안에서도 쉬지 않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브라질에서는 열대 숲에 넋을 잃었지만, 그곳의 노예 제도는 몹시 싫어해 선장과 말다툼까지 벌였습니다. 남아메리카 남쪽 벼랑에서는 오늘날의 조개껍데기 곁에 묻힌 거대한 동물의 뼈 화석을 찾았습니다. 이미 사라진 큰 동물들이 지금 남아메리카에 사는 동물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1835년 칠레에서는 지진을 겪었습니다. 바닷물 높이보다 위로 올라온 홍합 밭을 보며 땅이 막 솟아올랐다는 것을 알아챘고, 높은 안데스 산속에서도 조개껍데기를 찾았습니다.
섬마다 달랐던 새와 거북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은 칠레의 흉내지빠귀와 닮았지만 섬마다 조금씩 다른 새들을 보았습니다. 거북 등딱지 모양만 보고도 어느 섬에서 왔는지 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정작 그 거북을 모아 오지는 못했고, 배에 실은 거북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노트를 정리하던 다윈은, 흉내지빠귀와 거북에 대한 짐작이 맞다면 「이런 사실들은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흔든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흔들 수도 있다」로 고쳐 적었습니다.
1836년 10월 2일 배가 잉글랜드에 닿았을 때, 다윈은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가 헨슬로에게 보낸 편지들이 그 사이 과학 모임에서 읽히고 잡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열두 종의 핀치
돌아온 다윈이 가져온 표본은 전문가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1837년 새 박사 존 굴드는 다윈이 이것저것 섞인 새라고 여긴 갈라파고스의 새들이 사실은 열두 종의 핀치라고 밝혔습니다. 섬마다 다른 흉내지빠귀도 그냥 변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이었습니다.
돌아온 지 겨우 여섯 달 남짓 지난 그해 3월, 다윈은 노트에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뀐다」는 생각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하나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가는 나무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든 생물이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생각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결혼할까, 말까
다윈은 일에 짓눌렸습니다. 여행기를 고쳐 쓰고, 표본 보고서를 엮고, 지질학 책까지 맡았습니다. 1837년 9월 20일에는 심장이 두근거려 의사가 일을 모두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다윈은 평생 배앓이와 구토, 두근거림, 떨림에 시달렸고, 특히 사람을 만나야 할 때 심해졌습니다. 무슨 병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838년 7월, 다윈은 종이 두 장에 「결혼한다」와 「결혼하지 않는다」를 나눠 적었습니다. 결혼하면 「늙어서도 곁에 있는 친구, 어쨌든 개보다는 낫다」를 얻고, 「책 살 돈이 줄고」 「시간을 몹시 잃는다」고 적었습니다. 결론은 결혼이었습니다.
1838년 11월 11일, 다윈은 외사촌 에마 웨지우드에게 청혼했고,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신앙이 깊었던 에마는 남편의 의심이 저세상에서 둘을 갈라놓을까 걱정하면서도, 생각이 다른 것을 솔직하게 나눠 주는 그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둘은 1839년 1월 29일 결혼했습니다.
「살인을 털어놓는 것 같다」
1838년 9월, 다윈은 재미 삼아 읽던 인구에 관한 책에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사람은 먹을 것보다 훨씬 빨리 늘어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윈은 생물도 늘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이 태어난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살기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차이를 가진 것은 살아남아 그 차이를 새끼에게 물려주고, 불리한 차이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쌓이면 새 종이 생깁니다. 농부가 좋은 가축만 골라 키우는 것을 자연이 하는 셈이라, 다윈은 이를 「자연 선택」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이 생각을 바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1844년, 믿을 만한 식물학자 친구에게 털어놓으며 그는 「살인을 고백하는 것 같다」고 썼습니다. 그해 생각을 230쪽짜리 글로 정리해 두고, 자기가 일찍 죽더라도 생각이 남도록 해 두었습니다.
따개비 8년, 그리고 딸 애니
런던을 떠나 시골집 다운 하우스로 옮긴 다윈은 8년 동안 따개비를 해부하고 분류했습니다. 그 연구로 1853년 왕립 학회의 메달을 받으며 생물학자로 이름을 굳혔습니다. 그래도 연구를 마치며 남긴 말은 「나만큼 따개비를 미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였습니다.
다윈 부부는 아이를 열 명 낳았습니다. 다윈은 아이들을 유난히 살뜰히 챙기는 아버지였습니다. 1851년, 아끼던 딸 애니가 병에 걸려 열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부에게 큰 상처였습니다. 다윈은 자기 병이 아이들에게 대물림된 것이 아닐까, 사촌끼리 결혼한 탓이 아닐까 두려워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논문
1858년 6월 18일, 다윈은 머나먼 동남아시아에서 일하던 젊은 자연학자 앨프리드 월리스가 보낸 글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윈이 20년 동안 다듬어 온 자연 선택이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다윈은 「선수를 빼앗겼다」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마을에는 성홍열이 돌아 아이들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다윈은 일을 친구들에게 맡겼고, 친구들은 7월 1일 두 사람의 글을 함께 학회에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그 사흘 전인 6월 28일 밤, 다윈의 막내아들이 성홍열로 숨졌습니다. 다윈은 너무 슬퍼 발표장에 가지 못했습니다.
찍은 것보다 주문이 많았던 책
다윈은 13개월을 매달려 『종의 기원』을 썼습니다. 1859년 11월 22일 서점에 나가자, 1,250부가 모자랄 만큼 주문이 몰렸습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아주 단순한 시작에서 끝없이 아름답고 놀라운 생물들이 생겨났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고.
책은 사람의 기원을 대놓고 다루지는 않았지만, 읽는 사람은 그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윈의 생각을 지지한 젊은 학자 헉슬리는 책을 읽고 「이걸 생각 못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었나!」라고 했습니다. 1860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토론에서는 주교가 사람이 원숭이에게서 나왔다는 생각을 공격했고, 헉슬리가 맞섰습니다. 다윈은 병 때문에 이런 자리에 나서지 못했지만, 신문 기사와 만평까지 하나하나 챙겨 읽었습니다.
긴 대롱을 가진 나방을 맞힌 예언
책을 낸 뒤에도 다윈은 병상에서 실험을 이어 갔습니다. 1862년에는 난초 꽃이 저마다 특정한 곤충을 불러들이도록 생겼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꿀주머니가 40센티미터 넘게 긴 난초가 발견되자, 다윈은 그 꿀을 빨 만큼 긴 대롱을 가진 큰 나방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런 나방은 1903년, 다윈이 세상을 떠나고 한참 뒤에야 마다가스카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862년 병을 앓으며 기르기 시작한 수염은 그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만화가들은 그를 원숭이로 그렸고, 그런 그림이 오히려 그의 생각을 널리 알렸습니다. 1871년에는 사람도 다른 동물에서 나왔다는 책을 내면서, 그래도 사람은 모두 한 종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마지막 책은 1881년에 낸 지렁이 책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 외삼촌 집 마당에서 땅 위의 재가 흙 속으로 사라진 것을 보고, 지렁이가 한 일이 아닐까 처음 품었던 물음이었습니다.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1882년 4월 19일, 다윈은 다운 하우스에서 일흔셋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마에게 「나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소. 당신이 내게 얼마나 좋은 아내였는지 기억해요」라고 말했고, 곁을 지킨 아이들에게는 「너희가 돌봐 준다면 아픈 것도 할 만하구나」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다윈은 마을 교회 묘지에 묻히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료 과학자들과 사람들의 청원으로,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뉴턴 가까이에 묻혔습니다.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찾아왔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다윈
운명 앱 풀이는 다윈을 「배려가 깊고 꼼꼼해서, 둘레를 가꾸는 일에서 삶의 뜻을 찾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갈라파고스의 새를 섬마다 가르고, 따개비를 8년 동안 해부하고, 「흔든다」를 「흔들 수도 있다」로 고쳐 쓴 사람에게 「꼼꼼함」은 꼭 맞습니다. 아이들의 병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고, 생각이 다른 아내와 솔직하게 마음을 나눈 모습은 「배려」 쪽입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찰스 다윈」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