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809–1865

에이브러햄 링컨

남북전쟁을 이끌고 노예 해방을 선언한 미국 16대 대통령.

차례
  1.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아이
  2. 아홉 살에 잃은 어머니
  3. 1년이 안 되는 학교, 평생의 책
  4. 씨름판의 가게 점원
  5.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다」
  6. 들판의 변호사와 달력 한 권
  7.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8. 거친 결혼, 먼저 떠난 아들들
  9. 「스스로 갈라진 집은 서 있을 수 없다」
  10. 수염을 기르라는 소녀의 편지
  11. 몰래 들어간 수도
  12. 노예 해방 선언
  13. 게티즈버그의 짧은 연설
  14. 포드 극장의 밤
  15. 운명 앱으로 본 링컨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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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앱 풀이 — 「배려가 깊고 꼼꼼해서, 둘레를 가꾸는 일에서 삶의 뜻을 찾는 분이에요.」

양력 1809-02-12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2 · 흙 3 · 쇠 0 · 물 0 — 기운이 센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아이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미국 켄터키주의 방 하나짜리 통나무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에서는 같은 날 찰스 다윈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토머스는 농사를 짓고 가구와 목수 일을 했습니다. 링컨은 누나 새라에 이어 둘째였고, 동생은 아기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켄터키에 여러 번 땅을 샀지만, 서류가 분명하지 않아 소송으로 땅을 잃곤 했습니다. 1816년 가족은 땅문서가 더 확실한 인디애나로 옮겨 숲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 제도에 반대했습니다.

아홉 살에 잃은 어머니

1818년 10월 5일, 어머니 낸시가 소젖을 통해 옮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링컨은 아홉 살, 누나는 열한 살이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는 아이 셋을 둔 과부 새라와 다시 결혼했습니다. 링컨은 새어머니와 가까워져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1828년에는 누나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 링컨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1년이 안 되는 학교, 평생의 책

링컨은 거의 혼자 힘으로 공부했습니다. 떠돌이 선생에게서 잠깐씩 배운 것이 전부여서, 열다섯 살까지 학교에 다닌 날을 다 합쳐도 12개월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평생 배우기를 좋아했습니다.

십 대의 링컨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었고, 아버지는 그 시절 풍습대로 아들을 이웃 농가에 일꾼으로 보내 품삯을 챙겼습니다.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던 아버지와 링컨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185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링컨은 임종에도 장례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친구들과 납작한 배에 짐을 싣고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내려갔습니다. 그곳의 노예 시장은 젊은 링컨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겼습니다.

씨름판의 가게 점원

1830년 가족은 서쪽 일리노이로 옮겼고, 이듬해 링컨은 집을 나와 뉴세일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홀로서기를 했습니다. 잡화점에서 일하던 그는 동네 불량배 무리의 우두머리를 씨름으로 이겨 힘세고 배짱 있는 젊은이로 이름이 났습니다.

1832년 그는 주의회 의원에 나섰다가, 원주민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민병대에 들어가 대장으로 뽑혔습니다. 싸움터에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사람을 모았지만, 이름도 힘 있는 친구도 돈도 없어 선거에서 떨어졌습니다. 친구와 차린 가게는 빚만 지고 문을 닫았습니다. 링컨은 마음이 약해 누구에게도 외상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다」

링컨은 마을 우체국장과 땅을 재는 일을 하면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고,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가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링컨은 법률책을 빌려 혼자 읽었습니다. 훗날 그는 법을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1836년 9월 9일, 그는 변호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1834년에는 주의회 의원에 뽑혀 네 번을 지냈습니다. 일리노이의 주도를 스프링필드로 옮기는 일을 이끌었고, 자기도 그곳으로 옮겨 변호사 일을 했습니다.

들판의 변호사와 달력 한 권

링컨은 들판을 돌며 거의 모든 종류의 사건을 맡았습니다. 강을 오가는 배와 새로 놓인 철교 사이의 다툼도 많았습니다. 1849년에는 얕은 물에서 배를 띄워 옮기는 장치로 특허를 받았습니다. 상품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특허를 가진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858년의 살인 사건 재판은 지금도 이야기됩니다. 한 증인이 달빛 아래에서 범행을 똑똑히 보았다고 말하자, 링컨은 농사 달력을 꺼내 그날 밤 달이 낮게 떠 있어 잘 보일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피고는 풀려났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1846년 링컨은 연방 하원 의원에 뽑혔습니다. 그때 미국은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멕시코 군대가 먼저 미국 땅에 들어와 미국 사람의 피를 흘렸다고 했습니다. 초선 의원 링컨은 그 일이 일어난 「바로 그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 의회에 밝히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대통령 쪽은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링컨은 고향에서 인기를 잃었고, 신문들은 그를 비꼬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수도 워싱턴에서 노예 제도를 없애자는 법안도 준비했지만, 같은 당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접었습니다. 처음 약속한 대로 한 번만 의원을 지낸 뒤, 그는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습니다.

거친 결혼, 먼저 떠난 아들들

뉴세일럼 시절 링컨이 가까이 지내던 앤 러틀리지는 1835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링컨은 이 죽음에 크게 무너져 깊은 우울에 빠졌습니다. 둘이 연인이었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1839년 링컨은 스프링필드에서 부잣집 딸 메리 토드를 만났습니다. 약혼했다가 한 번 깨고 다시 화해해, 1842년 11월 4일 결혼했습니다.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둘은 아들 넷을 두었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 산 것은 맏아들 하나뿐이었습니다. 둘째 에디는 어린 나이에 병으로, 셋째 윌리는 대통령 관저에서 열한 살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무척 사랑했던 링컨은 깊은 우울에 시달렸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우울증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스스로 갈라진 집은 서 있을 수 없다」

그 무렵 미국은 노예 제도를 두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1854년, 새로 생긴 서쪽 땅에서도 노예를 둘 수 있게 하는 법이 통과되자 링컨은 다시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뒤 6년 동안 이 문제로 175번쯤 연설을 했습니다.

1858년 상원 의원 선거에 나선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갈라진 집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인 채로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상대 후보와 일곱 번 맞붙은 토론에는 권투 시합처럼 수천 명이 몰렸습니다. 상대였던 더글러스조차 링컨이 그 당의 가장 강한 사람이라, 이기더라도 힘겨운 승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이 토론으로 링컨은 나라 전체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수염을 기르라는 소녀의 편지

1860년 뉴욕에서 한 연설을 듣고, 많은 청중은 그가 어색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연설이 끝났을 때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해 5월 링컨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11월 6일 대통령에 뽑혔습니다. 네 사람이 겨룬 선거에서 표의 39.8퍼센트를 얻었는데, 남쪽의 노예 주 15곳 가운데 10곳에서는 그에게 던진 표가 한 장도 없었습니다.

키는 193센티미터쯤이었고, 목소리는 높았습니다. 바지 밑단과 신발 사이로 정강이가 드러나도 개의치 않을 만큼 옷차림에는 무심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수염 난 링컨의 얼굴은 1860년, 열한 살 소녀 그레이스 베델이 수염을 길러 보라고 권한 뒤에 생긴 것입니다. 시인 월트 휘트먼은 그의 얼굴을 「너무 못생겨서 오히려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몰래 들어간 수도

링컨이 대통령에 뽑히자, 노예를 두던 남쪽 주들이 하나둘 나라에서 떨어져 나가 따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링컨을 노린다는 소문 때문에, 그는 늘 쓰던 높은 모자 대신 부드러운 모자를 쓰고 큰 키를 감추려 몸을 웅크린 채 몰래 워싱턴에 들어갔습니다.

1861년 3월 취임 연설에서 그는 남쪽을 향해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 친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 남부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예 해방 선언

링컨에게 가장 큰 목표는 나라가 갈라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한 명도 풀어 주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고, 모두 풀어 주어서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함께 밝혔습니다.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정부에 맞서 싸우던 주의 노예들은 자유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서명하며 그는 「살면서 이 종이에 서명하는 지금만큼 내가 옳은 일을 한다고 확신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전날 밤, 노예이던 사람들과 이미 자유로운 흑인들은 곳곳에 모여 「자유의 전야」를 지켰습니다. 이 선언으로 해방된 흑인들도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티즈버그의 짧은 연설

1863년 11월 19일, 링컨은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게티즈버그의 전사자 묘지를 봉헌하는 자리에서 짧은 연설을 했습니다. 이 나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 위에 세워졌다고, 여기서 죽은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연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링컨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나라 전체의 추수 감사절로 정했습니다.

1864년 링컨은 다시 대통령에 뽑혔습니다. 두 번째 취임 연설은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너그럽게」로 끝났습니다. 전쟁으로 찢긴 나라의 상처를 싸매자는 말이었습니다. 이 연설은 지금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포드 극장의 밤

1865년 4월 9일, 남부군의 리 장군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나 갔습니다. 4월 11일 마지막 연설에서 링컨은 흑인 일부에게도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연설을 듣던 배우 존 윌크스 부스가 대통령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4월 14일 저녁, 링컨은 아내와 함께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있었습니다. 밤 10시 15분, 부스가 귀빈석에 숨어들어 뒤에서 링컨의 머리를 쏘았습니다. 길 건너 집으로 옮겨진 링컨은 아홉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가, 4월 15일 아침 7시 22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암살당한 첫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달아난 부스는 2주 뒤 버지니아의 한 농장에서 붙잡히다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링컨의 관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윌리의 관과 함께 기차에 실려 2주 동안 고향 스프링필드로 돌아갔습니다. 기차가 지나는 철길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거나 말없이 슬퍼했습니다. 휘트먼은 그를 기리며 「오 선장이여! 나의 선장이여!」를 썼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링컨

운명 앱 풀이는 링컨을 「배려가 깊고 꼼꼼해서, 둘레를 가꾸는 일에서 삶의 뜻을 찾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같은 날 태어난 찰스 다윈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풀이입니다. 두 사람 다 태어난 시각이 기록에 없어 날짜만으로 셈하니, 같은 날 태어난 두 남자는 같은 풀이를 받습니다.

한 사람은 따개비와 지렁이를 들여다보았고, 한 사람은 갈라진 나라를 다시 꿰맸습니다. 외상을 거절하지 못한 가게 주인,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자」던 대통령에게 「배려」는 잘 맞습니다. 달력 한 권으로 증언을 뒤집은 변호사에게 「꼼꼼함」도 그렇습니다. 같은 사주가 얼마나 다른 삶이 될 수 있는지, 두 사람이 함께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에이브러햄 링컨」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91

같은 풀이가 나온 위인

태어난 날의 기운이 같아 운명 앱이 같은 풀이를 내놓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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