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2026-10-27

세종대왕의 사주 — 깊은 물로 태어난 왕

책을 빼앗기자 남은 한 권을 외운 왕자, 기생의 아들을 곁에 둔 왕, 아이 낳는 여종에게 100일을 준 왕. 실록에 남은 세종의 삶을 사주라는 도구로 가볍게 들여다봅니다.

차례
  1. 책을 빼앗긴 왕자
  2. 셋째 아들이 세자가 되던 날
  3. 해 뜨기 전에 시작하는 하루
  4. 젊은 학자에게 준 독서 휴가
  5. 17만 명에게 물어본 세금
  6. 기생의 아들을 곁에 둔 왕
  7. 해와 비를 재다
  8. 늙은 농부에게 물어 쓴 농사책
  9. 아이 낳는 여종에게 100일
  10. 스물여덟 글자
  11. 반대 상소와 왕의 대답
  12. 아픈 몸의 왕
  13. 생일은 어떻게 알았을까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壬물乙나무丁불
?辰용巳뱀丑소

운명 앱 풀이 — 「조용한 겉모습과 달리, 깊은 통찰과 넓은 품을 함께 지닌 분이에요.」

음력 1397-04-10 (양력 1397-05-15)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2 · 흙 2 · 쇠 0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쇠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책을 빼앗긴 왕자

세종이 세상을 떠난 날, 실록은 그의 일생을 길게 돌아봅니다. 맨 앞에 놓인 것은 공부입니다. 「합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2 「합에 있을 때」는 아직 왕이 되기 전, 왕자 시절을 말합니다.

너무 읽어서 걱정을 샀던 모양입니다. 「태종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2 아버지가 책을 모두 치웠는데, 미처 못 치운 한 권을 날마다 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여러 달 앓아누워 있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주로 보면 세종은 깊은 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주는 태어난 날의 첫 글자를 그 사람 자신으로 보는데, 세종의 그 글자가 바다나 큰 강을 뜻하는 壬(임)입니다. 운명 앱은 이렇게 태어난 사람을 「거대한 저수지처럼 깊고 넓은 내면을 품은 분이세요」라고 풀고, 「세상의 원리와 진리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크고」라고 덧붙입니다. 아버지가 걱정할 만큼 책을 붙든 왕자와 겹쳐 읽히는 대목입니다.

셋째 아들이 세자가 되던 날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맏형 양녕대군이 세자였고, 둘째 형 효령대군도 있었습니다.

1418년 여름, 세자의 잘못이 거듭 쌓이자 신하들이 세자를 바꾸자고 청했습니다. 태종은 그 자리에서 셋째를 고른 까닭을 하나하나 말합니다. 실록에 그 말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먼저 공부입니다.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아버지는 아들이 병날까 봐 밤에 책 읽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5 금지는 금지대로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책장을 비워 갔던 셈입니다.

태종이 든 까닭 가운데는 뜻밖의 것도 있습니다. 바로 술입니다. 왕은 중국 사신을 맞아 술자리를 이끌어야 하는데, 한 모금도 못 마시면 손님을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종은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고 말하고, 한 모금도 못 마시는 효령대군은 그래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5 그렇게 셋째가 세자로 정해지자, 실록은 태종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고 적습니다.5 맏아들을 내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태종은 살아 있는 채로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세종은 스물두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해 뜨기 전에 시작하는 하루

왕이 된 뒤의 하루를 실록은 이렇게 적습니다. 「매일 사야(四夜)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2 사야는 밤을 다섯으로 나눈 넷째 토막, 지금으로 치면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입니다. 그 시간에 일어나 옷을 갖춰 입고, 날이 밝으면 신하들의 인사를 받고, 나랏일을 보고, 관리들을 차례로 불러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으로 학자들과 책을 읽으며 토론했습니다.

깊은 물이라고 혼자 고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실록은 세종이 「처음으로 집현전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으로 하고」2 있었다고 적습니다. 학자들을 곁에 두고 묻고 의논한 것입니다. 실록은 또 세종이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2라고도 적었습니다.

젊은 학자에게 준 독서 휴가

세종 8년 겨울, 세종은 집현전의 젊은 학자 권채·신석견·남수문을 부릅니다. 그리고 뜻밖의 명령을 내립니다. 집현전에 앉혔더니 이런저런 일에 쫓겨 정작 책 읽을 틈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18

나라에서 월급을 주며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책을 읽으라고 한 것입니다. 다만 놀라는 휴가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세종은 글 읽는 방법은 대제학 변계량에게 지도받으라고 덧붙였습니다.18 이렇게 학자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일은 뒤에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이름으로 조선 내내 이어졌습니다.

책을 빼앗기던 왕자가 왕이 되어, 이번에는 신하들에게 책 읽을 시간을 내어 준 셈입니다.

17만 명에게 물어본 세금

세종 12년, 땅에 매기는 세금을 새로 정하려던 조정은 서울과 지방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백 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백 49명입니다.」4 찬성이 2만 명 넘게 많았습니다. 그래도 세종은 숫자만으로 정하지 않고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4

운명 앱은 이 사주가 일하는 방식을 이렇게 풉니다. 「팀원들의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방향을 찾아내는 통합적 접근이 강점이에요.」 육백 년 전, 십칠만 명에게 묻고 신하들과 다시 의논한 왕의 모습이 이 문장과 나란히 놓입니다.

기생의 아들을 곁에 둔 왕

세종 15년, 세종은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한 사람의 벼슬을 올려 주자고 의논합니다. 그 사람을 소개하는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6 신분으로 보면 벼슬길에 오르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반대도 있었습니다. 세종이 예전에 장영실에게 궁중의 물건 만드는 곳 일을 맡기려 하자, 이조 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막았습니다.6 세종은 의견이 갈리자 한 번 물러섰다가, 다시 대신들에게 물어 끝내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6 원나라에도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지만 장영실의 정밀함에는 못 미쳤을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황희와 맹사성도 반대하지 않았고, 장영실은 호군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여름, 그 물시계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실록은 세종이 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실수할까 걱정해 장영실에게 나무 인형을 만들게 했다고 적습니다. 인형이 때에 맞춰 스스로 종과 북과 징을 울려,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한 것입니다.7

다만 이 이야기는 끝이 좋지 않습니다. 세종 24년, 장영실이 만드는 일을 맡은 임금의 가마가 부러지는 일이 생깁니다. 실록은 짧게 적습니다.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8 실록에 장영실의 이름이 크게 나오는 것은 이 무렵이 마지막입니다.

해와 비를 재다

시간을 재는 기구는 궁 안에만 두지 않았습니다. 세종 16년 가을, 솥을 엎어 놓은 모양의 해시계 앙부일구를 사람이 많이 다니는 다리 곁과 종묘 앞에 놓았습니다. 함께 새긴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9 글을 모르는 사람도 볼 수 있게 시각을 글자 대신 동물 그림으로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같은 글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게 될 것이다.」9

비도 쟀습니다. 그전에도 각 도에서 비가 얼마나 왔는지 알려 오게 했지만, 땅이 젖은 정도로 짐작하는 것이라 흙에 따라 들쭉날쭉했습니다. 그래서 세종 23년, 쇠로 그릇을 부어 비를 받아 그 깊이를 재자는 건의가 올라옵니다.10 이듬해에는 그 그릇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붙고, 지방 고을마다 자기나 기와로 같은 크기의 그릇을 구워 객사 뜰에 두게 했습니다. 비가 그치면 고을 수령이 직접 깊이를 재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얼마나 왔는지 적어 올리게 했습니다.11 온 나라의 비를 같은 자로 잰 것입니다.

늙은 농부에게 물어 쓴 농사책

세종 11년, 세종은 정초 등에게 농사책을 엮게 합니다. 그때까지 조선의 농사책은 대부분 중국 책을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땅과 날씨가 다르니 중국 책대로 지으면 맞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책의 머리말은 세종이 어떻게 했는지를 이렇게 적습니다.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노농(老農)들을 방문(訪問)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19 고을마다 오래 농사지은 노인들을 찾아가, 실제로 해 보니 어떻더라는 이야기를 모아 오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책이 『농사직설』입니다. 머리말은 이 책을 「산야(山野)의 백성들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고 소개합니다.19 이듬해 책을 전국에 나눠 주며 세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므로, 내가 매양 농사에 정성을 쏟는 것이다.」20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은 궁궐 안에 작은 밭을 일궈 직접 농사를 살폈습니다. 훗날 가뭄이 든 해에 세종은 한 고을 수령에게 그 경험을 들려줍니다. 「내가 병진년에 밭 1무(畝)를 궁성(宮城) 안에서 갈아 친히 갈고 김매는 것을 살폈더니, 이 해에 한재(旱災)가 참혹하였으나 그 수확이 매우 많았다.」21 가뭄이 심했는데도 때를 맞춰 갈고 김맸더니 거둔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을 다그치지 말고 때를 놓치지 않게 도우라는 당부였습니다.

아이 낳는 여종에게 100일

세종 12년, 세종은 신하들에게 관청에서 일하는 여종의 출산 이야기를 꺼냅니다. 예전에는 아이를 낳고 7일 뒤면 다시 일하게 했는데, 세종은 이미 그것을 100일로 늘려 둔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남았다고 말합니다. 아이 낳기 직전까지 일하다가 집에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낳기 전 한 달도 쉬게 하자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세종이 덧붙인 말이 재미있습니다. 「가령 그가 속인다 할지라도 1개월까지야 넘을 수 있겠는가.」12 날짜를 속여 더 쉬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를 미리 막은 셈입니다.

네 해 뒤에는 남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아도 남편은 그대로 일을 나가야 해서 산모를 돌볼 수 없고,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세종은 이렇게 정합니다. 「이제부터는 사역인(使役人)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13 육백 년 전의 남편 출산휴가입니다.

스물여덟 글자

세종 25년 겨울, 실록은 짧게 적습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3 같은 기사는 그 글자를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고 끝맺습니다.3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입니다.

세 해 뒤 이 글자를 풀이한 책이 완성되자, 세종은 직접 머리말을 썼습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14 그래서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라는 것입니다.

같은 책에 신하 정인지가 붙인 글은 이 글자가 얼마나 쉬운지를 이렇게 자랑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14

반대 상소와 왕의 대답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닙니다. 세종 26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이 새 글자에 반대하는 긴 글을 올립니다. 중국을 섬기는 나라가 따로 글자를 만들면 비웃음을 산다는 것, 쓸데없는 재주에 왕이 시간을 쓴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반대한 사람들은 세종이 직접 뽑아 곁에 둔 집현전 학자들이었습니다.

세종은 그들을 불러 하나하나 되묻습니다. 신라의 설총이 만든 이두도 한자의 소리를 빌려 쓴 것인데, 그것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15 운서는 한자의 소리를 정리한 사전입니다. 소리를 가장 깊이 따져 본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말입니다.

새로운 것만 좋아하는 재주라는 비판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15 그날 세종은 상소에 이름을 올린 학자들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풀어 주었고, 말을 바꾼 정창손 한 사람만 벼슬에서 물렸습니다.15

아픈 몸의 왕

세종 21년, 마흔셋의 세종은 신하 김돈에게 자기 몸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아팠고, 등이 부어올라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할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잇습니다. 「또 소갈증(消渴症)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16 소갈증은 물을 자꾸 찾게 되는 병으로, 지금의 당뇨병과 닮은 병입니다.

눈도 나빠졌습니다.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16 한 걸음 앞의 사람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눈이 흐려진 상태에서, 세종은 그 뒤로도 십 년 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것도 이 말을 한 지 네 해 뒤입니다.

몸이 이렇게 된 데는 식성도 한몫했을지 모릅니다. 세종 4년 아버지 태종의 상중에 세종이 고기를 끊자, 신하들이 걱정하며 고기를 권합니다. 그 까닭이 이렇습니다.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17 그래도 세종은 상중이라며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승려는 항상 소식만 하여도 오히려 살찐 자가 있는데, 나만 소식을 못한단 말인가.」17

생일은 어떻게 알았을까

실록은 세종이 태어난 날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였으니」.1 며칠이라는 숫자 대신, 옛날 날짜마다 붙이던 이름인 「임진」을 적은 것입니다. 그달의 임진날은 10일이었으니 생일은 음력 4월 10일, 지금 달력으로 1397년 5월 15일입니다. 이 날짜를 운명 앱에 넣으면 앱이 계산한 날의 이름도 임진으로 나옵니다. 육백 년 전 사관의 기록과 앱의 계산이 맞습니다.

세종은 세종 32년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록이 적은 그날의 이름도 임진이었고,2 앱으로 계산해도 임진입니다. 날의 이름은 60일마다 돌아오니 우연이지만, 태어난 날과 떠난 날이 같은 이름이라는 것은 한 번쯤 눈길이 갑니다.

그날 실록은 세종의 삶을 돌아보며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2 요와 순은 옛 중국에서 가장 어진 임금으로 꼽히던 두 사람입니다. 바다 동쪽 나라의 요순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난 시각은 기록에 없어서, 위의 사주표는 시간 칸을 비워 둔 채로 읽었습니다.


  1. 『세종실록』 1권, 총서. https://sillok.history.go.kr/id/kda_000 ↩

  2.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2월 17일 임진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3202017_001 ↩↩↩↩↩↩↩

  3.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512030_002 ↩↩

  4.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0일 무인 5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208010_005 ↩↩

  5.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3일 임오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806003_001 ↩↩↩

  6.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9월 16일 을미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509016_003 ↩↩↩

  7.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7월 1일 병자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607001_004 ↩

  8.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6일 정축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403016_002 ↩

  9. 『세종실록』 66권, 세종 16년 10월 2일 을사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610002_004 ↩↩

  10.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임오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308018_004 ↩

  11.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5월 8일 정묘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405008_001 ↩

  12.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0월 19일 병술 6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210019_006 ↩

  13.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4월 26일 계유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604026_003 ↩

  14.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809029_004 ↩↩

  15.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경자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 ↩↩↩

  16.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1일 정유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106021_003 ↩↩

  17. 『세종실록』 17권, 세종 4년 9월 21일 을해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409021_004 ↩↩

  18.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2월 11일 경오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812011_004 ↩↩

  19. 『세종실록』 44권, 세종 11년 5월 16일 신유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105016_002 ↩↩

  20.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2월 14일 을유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202014_004 ↩

  21.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4일 경자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106024_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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