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769–182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의 황제. 유럽을 휩쓴 군인이자 『나폴레옹 법전』을 남겼다.

차례
  1. 프랑스 땅이 된 지 한 해 만에
  2. 놀림받던 코르시카 소년
  3. 고향에서 쫓겨난 집안
  4. 툴롱의 젊은 포병
  5. 파리 거리의 대포
  6. 이탈리아를 휩쓴 장군
  7. 학자 167명을 데리고 간 이집트
  8. 서른 살의 제1 집정
  9. 스스로 쓴 황제의 관
  10. 아우스터리츠의 해
  11. 모스크바의 불
  12. 엘바섬에서 돌아온 100일
  13. 대서양 외딴섬의 마지막 6년
  14. 운명 앱으로 본 나폴레옹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甲나무壬물己흙
?午말申원숭이丑소

운명 앱 풀이 — 「꾸며 내지 않아도 기운이 저절로 흘러나와, 사람들이 먼저 알아채는 분이에요.」

양력 1769-08-15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1 · 흙 2 · 쇠 1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물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프랑스 땅이 된 지 한 해 만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 지중해의 섬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작은 귀족 집안이었고, 처음 이름은 이탈리아식으로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였습니다. 코르시카는 그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야 프랑스 땅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싸운 쪽에 섰지만, 싸움에 진 뒤 프랑스 총독과 친해졌습니다. 그 총독의 도움으로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의 군사 학교에 들어갈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엄하게 키운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훗날 「아이의 앞날은 언제나 어머니가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놀림받던 코르시카 소년

1779년 1월, 아홉 살의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로 건너갔습니다. 집에서 쓰던 말은 코르시카 말과 이탈리아 말이어서, 프랑스어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끝내 유창해졌지만 코르시카 사투리가 남았고 철자는 서툴렀습니다.

군사 학교에서 그는 사투리와 고향, 작은 키, 서툰 프랑스어로 늘 놀림을 받았습니다. 소년은 말수가 줄고 우울해졌고, 책 읽기에 몰두했습니다. 다만 어른이 된 그의 키는 168센티미터쯤으로 그 시절 평균이었습니다. 「작은 나폴레옹」은 그를 깎아내리던 영국 신문이 퍼뜨린 놀림에 가까웠습니다. 한 시험관은 그가 수학에 늘 뛰어났다며 「훌륭한 뱃사람이 될 아이」라고 적었습니다.

1785년 2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나폴레옹은 2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습니다. 그는 파리 사관 학교를 졸업한 첫 코르시카 사람이 되어, 열여섯 살에 포병 장교가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쫓겨난 집안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나폴레옹은 혁명 편에 섰고, 고향 코르시카로 돌아가 그 뜻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코르시카 독립의 지도자는 나폴레옹의 아버지를 배신자로 여겨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1793년 코르시카 의회가 나폴레옹과 그 가족을 규탄하자, 보나파르트 집안은 섬을 떠나 프랑스 본토로 달아났습니다.

툴롱의 젊은 포병

1793년 9월, 스물네 살의 나폴레옹은 영국과 그 동맹군이 차지한 남쪽 항구 툴롱을 되찾는 군대의 포병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포를 서둘러 늘리고, 항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의 요새를 먼저 빼앗자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그 언덕에서 대포가 항구를 겨누면 적이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2월, 계획대로 요새를 빼앗자 도시가 함께 떨어졌습니다. 이 싸움으로 그는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눈에 들었고, 곧 장군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그를 밀어 주던 혁명 지도자 형제가 몰락하자, 나폴레옹도 의심을 받아 붙잡혔다가 두 주 만에 풀려났습니다. 장군 명단에서 지워지기까지 하며, 그의 길은 잠시 막힌 듯 보였습니다.

파리 거리의 대포

1795년 10월, 왕을 다시 세우려는 무리가 파리에서 혁명 정부에 맞서 들고일어났습니다. 툴롱에서의 활약을 기억한 정부 지도자가 나폴레옹에게 정부를 지키는 일을 맡겼습니다. 나폴레옹은 대포가 열쇠라고 보고, 젊은 기병 장교를 보내 대포를 끌어 오게 해 중요한 길목마다 세웠습니다. 10월 5일, 그는 몰려오는 무리에게 포를 쏘아 반란을 꺾었습니다.

몇 주 뒤 그는 조제핀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1796년 3월 9일 결혼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이탈리아식 이름 대신 프랑스식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를 휩쓴 장군

결혼 이틀 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두 주 만에 한 나라를 전쟁에서 몰아내고, 오스트리아 군대를 잇달아 꺾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100킬로미터쯤 남은 곳까지 밀고 들어가자, 오스트리아는 평화를 청했습니다. 그는 1,100년을 이어 온 베네치아 공화국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이 원정에서 그는 엄청난 재물과 300점이 넘는 그림과 조각을 프랑스로 실어 갔습니다. 1797년 12월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학자 167명을 데리고 간 이집트

나폴레옹은 영국의 바닷길을 끊으려 이집트로 갔습니다. 이 원정에는 수학자와 자연학자, 화학자 등 학자 167명이 함께했습니다. 가는 길에는 몰타섬에 들러, 병사 셋만 잃고 중요한 해군 기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학자들이 찾아낸 것 가운데 하나가, 훗날 이집트 옛 글자를 읽는 열쇠가 된 로제타석입니다.

1798년 7월 피라미드 근처 싸움에서 크게 이겼지만, 8월 1일 영국 함대가 프랑스 배를 두 척만 남기고 모두 부수거나 빼앗았습니다. 이듬해 시리아로 쳐들어갔을 때는 야파에서 붙잡은 포로 1,500명에서 5,000명을 처형하게 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전염병에 시달리다 이집트로 물러났습니다. 1799년 8월, 프랑스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명령도 받지 않은 채 군대를 남겨 두고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서른 살의 제1 집정

이집트에서는 실패했지만, 파리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맞았습니다. 정부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동조자들과 함께 정부를 뒤엎었고, 이튿날 총검을 든 병사들을 앞세워 의회를 굴복시켰습니다. 서른 살의 그는 「제1 집정」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그는 신문 대부분을 닫고 검열을 시작했습니다. 1800년 5월에는 군대를 이끌고 험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고, 6월 14일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 3만 명에 2만 4천 명으로 맞서 밀리다가 저녁 무렵 지원군이 닿으면서 싸움을 뒤집었습니다. 1803년에는 북아메리카의 넓은 땅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았습니다.

스스로 쓴 황제의 관

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에는 로마 교황까지 참석했습니다. 교황이 기름을 부어 축복한 뒤, 나폴레옹은 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자기 머리에 썼습니다. 그리고 조제핀에게도 관을 씌웠습니다.

같은 해 3월에는 훗날 「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리게 되는 민법전이 시행되었습니다.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종교를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지켜 주고, 자식들이 고루 물려받게 한 법이었습니다. 그는 법전을 고치는 회의에 직접 나가 의견을 냈습니다. 다만 이 법은 여성과 아이의 권리는 줄였습니다. 법전은 그의 군대를 따라 유럽 곳곳으로 퍼져, 지금도 여러 나라의 법에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아우스터리츠의 해

1805년 12월 2일, 대관식 1주년이 되는 날,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는 이 싸움을 자기가 치른 싸움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형과 동생을 나폴리와 네덜란드의 왕으로 앉혔습니다.

나폴레옹은 운을 믿었습니다. 장군을 고를 때면 늘 「그 사람은 운이 좋은가?」라고 물었습니다. 그와 조제핀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대를 이을 아들을 원한 그는 1810년 1월 조제핀과의 결혼을 무르고, 그해 4월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습니다.

모스크바의 불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4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싸우지 않고 물러나며 지나는 땅을 모두 불태워, 프랑스 군대는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8월 스몰렌스크를 빼앗을 때 이미 9,000명을 잃었습니다. 9월 7일 모스크바 앞 보로디노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붙잡힌 사람이 양쪽 합쳐 8만 명 가까이 나온 싸움을 치렀고, 9월 14일 마침내 모스크바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저녁, 모스크바 총독의 명령으로 도시에 불이 붙었습니다. 러시아 황제는 끝까지 평화를 협상하지 않았고, 여섯 주 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군대는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쉼 없는 습격에 무너졌습니다.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 강을 건넜고, 살아서 국경을 다시 넘은 것은 약 7만 5천 명뿐이었습니다. 러시아 쪽 군인도 30만 명까지 잃었습니다.

엘바섬에서 돌아온 100일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진 나폴레옹은 이듬해 4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근위대와 작별하며 그는 「나의 아이들이여, 안녕히」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앞바다의 작은 섬 엘바로 쫓겨났습니다. 그해 5월, 그는 조제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동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약 1,000명을 데리고 엘바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를 막으러 온 군대 앞에 홀로 걸어 나간 그는 「여기 있다. 원한다면 너희 황제를 쏘아라!」라고 외쳤습니다. 병사들은 「황제 만세!」를 외치며 그의 편에 섰습니다. 몇 주 전 그를 쇠 우리에 가둬 파리로 끌고 오겠다고 큰소리치던 원수 네마저 6,000명을 이끌고 그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는 다시 파리에 들어갔지만,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물러난 그는 미국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항구를 막고 있던 영국 배를 보고 7월 15일 스스로 그 배에 올라 항복했습니다.

대서양 외딴섬의 마지막 6년

영국은 나폴레옹을 아프리카 서쪽 바다에서 1,870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의 섬 세인트헬레나로 보냈습니다. 병사 2,100명이 그를 지키고 배 10척이 섬 둘레를 돌았습니다. 축축하고 바람이 들이치며 쥐가 들끓는 집에서, 그는 그래도 저녁 식사 자리에는 남자는 군복, 여자는 드레스를 갖춰 입게 했습니다. 갇힌 처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는 회고록을 받아 적게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몇 달 동안 영어도 배워 보았지만, 어려서부터 말을 배우는 데는 서툴렀던 그는 끝내 그만두었습니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은 쉰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앗아 간 것과 같은 위암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 말은 「프랑스, 군대, 조제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유언장에서 센강 가에 묻히고 싶다고 했습니다. 1840년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돌아왔고, 7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장례 행렬이 지나는 길을 지켰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나폴레옹

운명 앱 풀이는 나폴레옹을 「꾸며 내지 않아도 기운이 저절로 흘러나와, 사람들이 먼저 알아채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막으러 온 병사들 앞에 홀로 걸어 나가 「쏘아라」라고 외쳤을 때, 병사들이 먼저 그의 편에 선 장면이 그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꾸며 내지 않아도」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스스로 관을 쓰고, 외딴섬에서도 드레스와 군복을 갖추게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운을, 누구보다 열심히 꾸며 보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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