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762–1836

정약용

조선 후기 실학자. 『목민심서』를 썼다.

차례
  1. 「농사지으러 돌아간다」는 이름
  2. 눈썹이 셋인 아이
  3. 열다섯 살의 결혼, 그리고 새로운 학문
  4. 임금이 알아본 젊은이
  5. 화성을 쌓은 거중기
  6. 관리를 고발한 사람에게 상을
  7. 한 권의 책이 부른 그림자
  8. 일곱 계단 아래로
  9. 임금이 떠난 여름
  10. 나주에서 갈라진 두 형제
  11. 주막 뒷방, 「사의재」
  12. 차를 가르쳐 준 귀양객
  13. 다산초당의 18년
  14. 결혼 60주년 아침
  15. 운명 앱으로 본 정약용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丁불丁불壬물
?未양未양午말

운명 앱 풀이 — 「타오르는 촛불처럼 조용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온기를 지닌 분이세요.」

음력 1762-06-16 (양력 1762-08-05)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0 · 불 3 · 흙 2 · 쇠 0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농사지으러 돌아간다」는 이름

정약용은 1762년 음력 6월 16일,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마재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되는 두물머리 가까운 곳입니다.

그해 봄, 조선에는 큰일이 있었습니다. 영조 임금이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것입니다. 벼슬을 하던 아버지 정재원은 이 일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내려놓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태어난 넷째 아들에게 「귀농」이라는 어릴 적 이름을 붙였습니다. 「농사지으러 돌아간다」는 뜻으로, 벼슬을 탐하다 다툼에 휘말리지 말라는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인 윤선도의 집안 사람으로, 그림으로 이름난 윤두서가 외증조할아버지였습니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으로 이름난 집이었습니다. 8대를 이어 나라의 가장 이름 높은 학자 관청에 이름을 올렸고, 정약용은 이를 평생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속한 무리가 나라 일에서 밀려난 뒤로는, 할아버지 대까지 3대가 벼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눈썹이 셋인 아이

어린 정약용은 천연두를 앓았습니다. 이름난 의원의 치료로 살아났지만, 눈썹에 흉터가 남아 눈썹이 셋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삼미」, 곧 눈썹 셋이라는 별명을 지었습니다. 열 살 전에 지은 시를 모은 책에도 『삼미자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습니다.

훗날 정약용은 자기를 살린 의원의 책을 바탕으로, 더 발전한 홍역 치료 책 『마과회통』을 썼습니다. 이 책은 서양 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많은 조선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정약용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벼슬자리를 옮겨 다니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에게서 배웠습니다. 네 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 지은 시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은 뒤로는 맏형수와 새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열 살 무렵에는 옛 경전을 본떠 쓴 글이 자기 키만큼 쌓였다고 합니다.

열다섯 살의 결혼, 그리고 새로운 학문

1776년, 열다섯 살의 정약용은 홍화보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 홍화보는 몸집은 작아도 용맹하고 병법에 밝은 무관이었습니다. 정약용이 훗날 나라를 지키는 법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었던 데에는 장인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얻어 집안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정약용은 서울에서 이가환, 그리고 큰누나의 남편인 매부 이승훈을 만났습니다. 이들을 통해 이익이라는 학자의 글을 처음 읽었습니다. 책상 위의 이론보다 백성의 살림에 실제로 쓸모 있는 학문을 하자는 생각이었고, 정약용은 깊이 빠져들어 평생 이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임금이 알아본 젊은이

1783년 정약용은 과거 시험의 첫 단계에 붙어 나라의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갔습니다. 이듬해 1784년, 정조가 낸 물음에 정약용이 내놓은 답이 치우침 없고 분명해 임금을 크게 감탄시켰습니다. 임금과 정약용 사이의 오랜 인연이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다달이, 열흘마다 치르는 시험에서 거듭 높은 성적을 받아 임금에게서 책과 종이, 붓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1789년, 정약용은 마침내 관리를 뽑는 큰 시험에 붙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정조 곁에서 공부하며, 한강에 배를 나란히 잇대어 묶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건너는 배다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화성을 쌓은 거중기

배다리를 본 정조는 정약용에게 큰일을 맡겼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새 무덤을 찾을 때 머물 수원 화성의 성벽을 설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유럽과 중국, 일본의 책까지 두루 참고해 전에 없던 방법을 내놓았습니다. 무거운 돌을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리는 기계인 거중기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794년에는 정조의 명을 받아 몰래 경기도를 돌며 관리들의 비리를 살피는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관리를 고발한 사람에게 상을

황해도 곡산의 원님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정약용이 오기 전, 이계심이라는 사람이 무거운 세금에 맞서 백성들을 이끌고 항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계심은 백성을 괴롭히는 일 10여 가지를 적어 스스로 정약용 앞에 나타났습니다.

정약용은 그를 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리의 잘못에 맞서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어야 한다며 그 용기를 북돋웠다고 전해집니다. 백성을 법으로 누르기보다, 살게 해 달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원님이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부른 그림자

정약용을 따라다닌 그림자는 천주교였습니다. 1784년, 큰형의 처남인 이벽이 처음으로 정약용에게 천주교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을 건넸습니다. 하늘과 땅이 생겨난 이치, 영혼과 몸에 관한 이벽의 이야기에 정약용은 곧 빠져들었습니다. 매부 이승훈은 그해 중국 베이징에서 조선 사람으로 처음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었고, 셋째 형 정약종은 훗날 조선 천주교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정약용 자신이 세례를 받았는지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1791년, 외가 쪽 친척 윤지충이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 방식으로 치르고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고 거듭 밝혔습니다. 그러나 반대편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두고 꺼내 들었습니다.

일곱 계단 아래로

1795년, 몰래 들어와 있던 중국인 신부를 잡지 못한 사건이 터지자, 반대편 사람들은 정약용도 이 일에 얽혀 있다고 몰아붙였습니다. 정조는 한발 물러서 정약용을 충청도에서 말과 심부름꾼을 두던 작은 역을 맡는 자리로 내려보냈습니다. 벼슬이 일곱 계단이나 떨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정약용은 천주교가 퍼지는 것을 막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불려 올라와 벼슬이 올랐지만 공격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1799년 정약용은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물러났습니다.

임금이 떠난 여름

1800년 여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급히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새 임금 순조는 열한 살 아이였고, 나라의 권력은 영조의 왕비였던 정순왕후에게 넘어갔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조와 사이가 나빴고, 정조가 아끼던 사람들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1801년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을 나라의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정약용은 그해 이른 봄 붙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학문으로 궁금해 들여다보았을 뿐이고 이미 오래전에 천주교와 끊었다고 했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셋째 형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은 그해 봄 사형을 당했습니다. 정약용이 끊었다는 증거가 하나둘 드러난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나주에서 갈라진 두 형제

처음 귀양을 간 곳은 지금의 포항 땅인 장기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큰 사건이 또 터졌습니다. 정약용 집안의 사위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를 알리며 서양 배와 군대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비단에 써서 베이징으로 보내려다 들킨 것입니다. 박해는 더 거세졌습니다. 이 박해로 3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다시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두 형제는 전라도 나주에서 헤어졌습니다. 형은 먼 섬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갔습니다. 정약전은 그 섬에서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법을 적은 『자산어보』를 남겼고, 두 형제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주막 뒷방, 「사의재」

1801년 겨울 끝자락, 강진에 닿은 정약용에게는 돈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성 동문 밖, 남편을 잃은 여인이 꾸리는 낡은 주막의 뒷방에 몸을 붙였고, 그곳에서 1805년까지 살았습니다.

그 작은 방에 정약용은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네 가지를 지키는 방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은 맑게, 모습은 단정하게, 말은 조용하게, 행동은 진실하게.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아 오랫동안 배앓이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그 방에서 공부를 놓지 않았습니다.

차를 가르쳐 준 귀양객

1805년 봄, 박해가 잦아들자 정약용은 강진 둘레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덕 위 백련사에 올랐다가 열 살쯤 어린 스님 혜장을 만났습니다. 혜장은 손님이 떠날 무렵에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고, 그날 밤 붙잡아 재우며 『주역』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둘은 곧 가까운 벗이 되었습니다. 1809년에는 혜장과 같은 대흥사에서 온 스님 초의가 찾아와 몇 달을 머물며 정약용에게 배웠습니다. 초의는 훗날 서울의 선비들에게 차를 나눠 주며 그 맛을 널리 알렸습니다.

만난 지 며칠 만에 정약용은 절 뒷산의 찻잎을 보내 달라는 시를 혜장에게 보냈습니다. 흔히 정약용이 스님에게서 차를 배웠다고 하지만, 둘이 주고받은 시들을 보면 오히려 이 지역 스님들이 정약용에게서 덩이차 만드는 법을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정약용이 1830년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딴 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갈고, 바위 틈 샘물로 반죽해 작은 덩이로 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산초당의 18년

1808년 봄, 정약용은 강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초가집으로 옮겼습니다. 어머니 쪽 먼 친척의 집이었습니다. 그 뒷산을 마을 사람들은 차나무가 많은 산, 「다산」이라 불렀습니다. 정약용은 이 이름을 자기 호로 삼았고, 지금 우리가 아는 「다산 정약용」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 집이 오늘날의 다산초당입니다.

그곳에서 정약용은 곁에 머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글을 썼습니다. 서재에는 책이 천 권 넘게 쌓였습니다. 귀양 동안 500권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쪽수로는 1만 4천 쪽쯤 됩니다. 정치와 법, 살림, 자연과 의학, 음악까지 두루 다뤘고, 고을 원님이 백성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적은 『목민심서』도 이 시절의 열매입니다.

결혼 60주년 아침

1818년 가을, 18년의 귀양이 끝났습니다. 정약용은 고향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벼슬길에 불러들이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반대편의 다툼에 막혔습니다. 그는 한강 가의 옛집 「여유당」에서 조용히 글을 다듬으며 지냈습니다.

1836년, 아내와 혼인한 지 60년이 되는 날 아침, 정약용은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는 결혼 60주년을 기리는 시였습니다. 18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아내 홍씨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839년에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고 한참 뒤인 1910년, 나라는 그에게 높은 벼슬과 「문도」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정약용

운명 앱 풀이는 정약용을 「타오르는 촛불처럼 조용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온기를 지닌 분이세요」라고 풉니다. 주막 뒷방에서 「말은 조용하게」를 지키며 18년을 버틴 사람, 그 어둠 속에서 백성을 돌보는 법을 쓴 사람에게 이보다 맞는 말은 드뭅니다. 관리를 고발한 사람에게 상을 주자던 원님의 마음이 그 「온기」입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정약용」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따랐습니다.

생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약용」 — 출생 1762년(영조 38) 6월 16일

같은 풀이가 나온 위인

태어난 날의 기운이 같아 운명 앱이 같은 풀이를 내놓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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