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820–1910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근대 간호의 틀을 세운 영국의 간호사.

차례
  1. 태어난 도시의 이름
  2. 열여섯 살의 부름
  3. 「차라리 노예선의 노잡이가」
  4. 주머니 속의 작은 올빼미
  5. 9년의 구애
  6. 망설임과 부모의 반대
  7. 전쟁터로 향하는 38명의 여성
  8. 「망치를 든 여인」
  9. 「등불을 든 여인」
  10. 닭 볏 모양의 도표
  11. 지옥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12. 침대에 누워 보낸 세월
  13. 『간호에 관한 노트』
  14. 전문 간호사의 길을 열다
  15. 「F.N. 1820–1910」
  16. 운명 앱으로 본 나이팅게일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丙불辛쇠庚쇠
?戌개巳뱀辰용

운명 앱 풀이 — 「따뜻하게 주변을 밝히는 태양과, 그 빛을 단단한 땅 위에 뿌리내리게 하는 실용성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에요.」

양력 1820-05-12 · 여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0 · 불 2 · 흙 2 · 쇠 2 · 물 0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태어난 도시의 이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별장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유럽을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언니 파르테노페가 나폴리 땅의 옛 그리스 이름을 따서 이름을 얻었듯, 동생도 태어난 도시의 영어 이름 「플로렌스」를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은 그녀가 한 살이던 1821년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아버지 윌리엄 나이팅게일은 당시 여성의 지적 교육에 대해 앞서 나간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딸들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아버지가 직접 교육 과정을 감독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윌리엄은 딸들에게 수준 높은 공부를 시켰습니다.

수업 내용에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와 같은 외국어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포함되었습니다. 수학과 헌법사, 문법, 작문, 영국 문학, 그리고 음악도 배웠습니다. 특히 라틴어 공부는 훗날 그녀가 여행 중에 만나는 수도원장이나 수도사들과 소통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열여섯 살의 부름

1837년 2월 7일, 열여섯 살의 나이팅게일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사회를 위해 일하라는 소명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이 순간을 하느님이 자신에게 보내신 여러 번의 부름 중 첫 번째였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름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식까지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소명을 느낀 이후 간호사라는 직업에 집중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던 그 시절, 그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노예선의 노잡이가」

1838년, 윌리엄 나이팅게일은 가족과 함께 또 다른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여정 중에 나이팅게일은 파리에서 활동하는 영국 태생의 여주인, 메리 클라크를 만났습니다. 클라크는 나이팅게일 가족과 가까워졌는데, 특히 나이팅게일을 지적인 동등한 존재로 대하며 친하게 지냈습니다.

클라크는 상류층 젊은 여성들을 제약하는 사회적 관습을 싫어했습니다. 그녀는 만약 선택해야 한다면 「여성보다는 차라리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클라크의 독립적인 태도와 그녀가 속한 지적 모임은 나이팅게일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지적인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주머니 속의 작은 올빼미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어린 올빼미 한 마리를 괴롭히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괴롭힘을 당하던 그 어린 올빼미를 구해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이 올빼미에게 아테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올빼미를 곁에 두고 자주 주머니 속에 넣어 다녔습니다. 아테나는 나이팅게일이 크림 전쟁을 위해 떠나기 직전에 죽을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습니다.

9년의 구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날씬하고 우아한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닌 매력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때로는 엄격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끈질기게 구애한 사람은 정치인이자 시인인 리처드 몽크턴 밀네스였습니다. 그의 구애는 9년이나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결국 그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간호사라는 자신의 소명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망설임과 부모의 반대

간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나이팅게일의 부모는 딸이 간호사가 되면 집안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러한 반대는 그녀가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늦추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언니 파르테노페의 저항도 거셌습니다. 가족들은 분노하고 괴로워하며 그녀를 막아섰습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부유한 영국 여성에게 요구되던 역할, 즉 아내나 어머니가 되는 길을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가족의 반대와 사회적 제약을 마주하면서도 간호의 기술과 과학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를 교육하며 노력했습니다.

전쟁터로 향하는 38명의 여성

부상병들이 겪는 참혹한 상황이 영국에 전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맞은편 스쿠타리 군 병원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1854년 10월 21일, 시드니 허버트의 승인 아래 나이팅게일 일행이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수석 간호사인 엘리자 로버츠, 이모인 메이 스미스를 포함한 38명의 여성 자원 간호사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헨리 에드워드 매닝이 동원한 15명의 가톨릭 수녀들도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 친구인 메리 클라크의 도움을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1854년 11월 초 스쿠타리의 병영 병원에 닿았습니다. 그곳은 흑해 너머 발라클라바의 영국군 주 캠프에서 약 295해리(546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망치를 든 여인」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약품이 급히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약품이 보관된 창고는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망치를 가져와 잠긴 창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약품을 확보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군인들은 그녀를 「망치를 든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러셀은 이러한 행동이 여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대신 다른 별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등불을 든 여인」입니다.

「등불을 든 여인」

모든 의료진이 밤을 맞아 물러가고 병동에 정적이 찾아오면, 길게 늘어선 병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누워 있는 수많은 환자 사이로 고요한 어둠이 깔릴 때면, 한 여인이 홀로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손에 작은 등불을 들고 복도를 따라 조용히 움직이며 환자들을 살피는 순찰을 돌았습니다.

그녀의 날씬한 모습이 복도를 따라 조용히 지나갈 때마다, 고통받던 환자들의 얼굴에는 고마움이 서린 부드러운 표정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신문은 그녀를 「과장 없이 말해 돌보는 천사」라고 썼습니다. 크림 전쟁 동안 종군 간호사로 일하며 간호사라는 직업을 널리 알린 그녀의 모습은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당시 신문인 더 타임즈의 보도에 등장한 문구 덕분에 그녀는 「등불을 든 여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밤마다 작은 등불을 들고 홀로 병실을 돌며 환자들을 살피는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닭 볏 모양의 도표

크림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던 나이팅게일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영국군 사망자 대부분은 전투 중 입은 부상 때문이 아니라, 병원의 치료 방식이나 위생 상태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숫자를 정리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 당시 병원의 의료 환경이 어떠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통계 자료를 시각적인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의회 의원들이나 공무원들은 전통적인 방식의 복잡한 통계 보고서를 읽거나 이해하기 어려워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데이터를 통해 결론을 쉽게 내리고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그래프를 고안했습니다.

그녀는 극지 영역 도표를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원형 히스토그램이나 파이 차트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나이팅게일은 이 도표들을 모아 「콕스콤」이라고 불렀습니다. 콕스콤은 닭의 볏을 의미하는데, 이 도표를 통해 군 병원에서 환자들이 계절별로 어떤 원인 때문에 사망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지옥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나이팅게일은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신이 정말 선한지 의심했습니다. 그녀는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끝내는 천국에 간다고 믿었고, 돌보던 사람들을 이 믿음으로 위로하곤 했습니다.

죽어 가던 젊은 여인 하나가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며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 빠진 이런 절망에 당신은 결코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비세요.」

나이팅게일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지금 너는 네가 가게 될 거라 여기는 그 신보다 더 자비롭지 않니? 진짜 하느님은 어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비로우시단다.」

침대에 누워 보낸 세월

전쟁터의 등불로 불리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1857년부터 나이팅게일은 간헐적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최근의 전기에서는 그녀가 1855년 5월 크림 지역에 도착한 직후 겪었던 '크림 열병'이 원인이 되어, 만성적인 브루셀라증과 척추염을 앓게 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에도 병원 설계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이어갔고, 그 결과물은 영국과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집에서 그녀는 그 무렵 막 생긴 우편 주문으로 플란넬 천을 골라 샀는데, 이 방식을 처음 만든 웨일스의 상인은 그녀의 이름을 손님으로 내세워 광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간호에 관한 노트』

1859년, 나이팅게일은 『간호에 관한 노트』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원래 집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당시 간호사는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보다 술 마시는 일에 더 관심이 있는 무능하고 부패한 간호사 캐릭터를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간호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책을 통해 간호 지식이 의료 지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녀는 「매일의 위생 지식, 즉 간호의 지식, 다시 말해 신체가 질병이 없는 상태가 되게 하거나 질병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법에 관한 지식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는 의료 지식과는 구별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지식으로 인식됩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책은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와 여러 간호 학교에서 교육 과정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또한 일반 독자들에게도 많이 팔리며 간호학을 소개하는 고전이 되었습니다.

전문 간호사의 길을 열다

1860년, 런던의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간호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 학교는 세계 최초의 비종교적 간호 학교로, 현재는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이 학교를 설립하고 간호 전문 서적을 쓰며 간호사를 전문 직업으로 성숙시켰습니다. 당시 간호사는 천대받던 직업이었으나, 그녀는 이를 전문적인 영역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간호사들이 지키는 '나이팅게일 서약'과 간호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국제적 영예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메달'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생일은 매년 국제 간호사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F.N. 1820–1910」

1910년 8월 13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런던 메이페어의 사우스 스트리트 10번지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듯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어달라는 제안도 있었으나, 유가족들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뜻에 따라 나이팅게일은 햄프셔 이스트웰로에 있는 성 마가렛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묘비에는 많은 글귀 대신 그녀의 이름 이니셜과 생몰 연도인 「F.N.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는 문구만 간략하게 적혔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나이팅게일

운명 앱 풀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따뜻하게 주변을 밝히는 태양과, 그 빛을 단단한 땅 위에 뿌리내리게 하는 실용성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에요」라고 풉니다. 등불을 들고 밤마다 병실을 돈 모습이 「따뜻한 빛」이라면, 잠긴 창고를 망치로 부수고 약을 꺼낸 일과 사망 원인을 도표로 그려 정치인들을 설득한 일은 「실용성」 쪽입니다. 풀이는 그녀와 잘 맞습니다. 다만 그 실용성은 부드럽지만은 않아서, 9년의 구애를 끝내 거절하고 가족의 반대도 꺾고 나아간 고집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3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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