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만유인력과 운동 법칙을 세운 영국의 과학자.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庚쇠 | 壬물 | 壬물 |
| ? | 戌개 | 子쥐 | 午말 |
운명 앱 풀이 —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강인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에요.」
양력 1643-01-04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0 · 불 1 · 흙 1 · 쇠 1 · 물 3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흙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냄비에 들어갈 만큼 작은 아기
뉴턴은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시골 마을 울즈소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잉글랜드가 쓰던 옛 달력으로는 1642년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 아기였습니다. 뉴턴은 훗날, 자기가 태어났을 때 1쿼트짜리 그릇에 들어갈 만큼 작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1쿼트는 1리터가 채 안 됩니다. 목을 가누지 못해 베개로 받쳐 줘야 했다고도 했습니다.
세 살 때 어머니가 이웃 마을 목사와 재혼해 떠나면서, 뉴턴은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새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은 오래 남았습니다. 열아홉 살까지 스스로 지은 죄를 적은 목록에,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집과 함께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했던 일을 적어 둘 정도였습니다.
싸움에서 이기고 1등이 된 소년
열두 살 무렵부터 뉴턴은 이웃 도시 그랜섬의 킹스 스쿨에 다녔습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달라진 계기는 싸움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자기를 괴롭히던 아이와 맞붙어 이기고 망신을 준 뒤, 뉴턴은 공부로도 앙갚음하겠다는 듯 매달려 반에서 1등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름을 날린 것은 시험보다 손재주였습니다. 해시계를 만들고, 풍차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던 1659년, 두 번째 남편마저 잃은 어머니가 아들을 학교에서 데려왔습니다. 농사를 짓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뉴턴은 농사일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결국 학교 교장과 외삼촌이 어머니를 설득해 그를 다시 학교로 돌려보냈습니다.
시중을 들며 다닌 대학
1661년 6월,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다른 학생과 교수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며 학비를 대는 학생으로 시작했습니다. 1664년 장학금을 받고서야 그 일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시 대학은 2천 년 전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으로 가르쳤습니다. 뉴턴은 그 책과 함께 데카르트와 갈릴레이 같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학자들의 책을 읽었습니다. 공책에는 「질문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풀리지 않는 물음을 하나씩 적어 나갔습니다.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공책 정리는 남달랐습니다. 중요한 쪽은 귀퉁이를 접어 두었고, 공책에 주제별로 알파벳순 찾아보기를 달았습니다. 오늘날 책 뒤에 붙은 찾아보기와 거의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흑사병이 준 2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1665년, 영국에 흑사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대학은 문을 닫았고, 뉴턴은 고향 울즈소프로 돌아가 2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학교도 스승도 없는 시골집이었지만, 이 시기에 그는 훗날 미적분이 되는 계산법을 다듬고, 빛과 색을 실험하고, 물체가 왜 떨어지는지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큰 생각 대부분이 이 2년 사이에 싹텄습니다.
훗날 한 물리학자는 이 2년을 두고 과학의 역사에서 견줄 만한 예가 없는 「황금의 두 해」라고 불렀습니다.
사과나무 그늘의 차 한 잔
1726년 4월 15일, 여든셋의 뉴턴은 런던 켄싱턴에서 젊은 친구 윌리엄 스터클리를 만났습니다. 둘은 정원으로 나가, 사과나무 몇 그루가 드리운 그늘 아래서 단둘이 차를 마셨습니다.
이야기 끝에 뉴턴이 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꼭 그때와 같다고, 중력이라는 생각이 처음 머리에 떠올랐던 때 말입니다. 생각에 잠겨 앉아 있는데 사과가 떨어졌고, 그는 스스로 물었습니다. 「저 사과는 왜 늘 땅으로 곧장 떨어질까? 왜 옆으로나 위로는 가지 않을까?」 답은 땅이 사과를 당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터클리가 적어 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영국 왕립학회가 원고째 공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널리 퍼진 것은 뉴턴의 조카딸이 프랑스 작가 볼테르에게 들려주고, 볼테르가 1727년 책에 옮겨 적으면서였습니다. 사과가 머리에 떨어졌다는 대목은 어느 기록에도 없습니다.
캄캄한 방의 무지개
1672년, 뉴턴은 캄캄한 방에 가느다란 햇빛 한 줄기만 들이고, 그 앞에 삼각 유리, 곧 프리즘을 세웠습니다. 빛은 빨강부터 보라까지 무지개 색으로 갈라졌습니다.
뉴턴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갈라진 빛을 렌즈로 다시 모았더니 도로 하얀 빛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얀 햇빛은 한 가지 빛이 아니라 모든 색이 합쳐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색마다 유리를 지날 때 꺾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이 생각을 내놓자 비판이 따라왔습니다. 왕립학회의 과학자 로버트 훅이 뉴턴의 생각 몇 가지를 반박하자, 뉴턴은 몹시 언짢아하며 공개 토론에서 아예 물러나 버렸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평생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오차를 평균 낸 사람
빛을 다루며 뉴턴은 또 하나의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1671년, 렌즈와 유리판 사이에 생기는 고리 무늬를 재면서 그는 여러 번 잰 값의 차이를 모두 평균 내고, 그 평균과 첫 고리의 값을 비교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때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방법이었습니다. 한 번 잰 값을 그대로 믿지 않고, 여러 번 재어 측정의 흔들림을 줄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험실에서 당연하게 쓰는 방법의 시작이었습니다.
1700년에는 이 방법을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곧 춘분과 추분의 때를 계산하는 데까지 넓혔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그때까지 전혀 없던 방법」이라고 평가합니다.
아홉 장짜리 원고
1679년, 뉴턴은 한동안 미뤄 두었던 물음을 다시 꺼냈습니다. 행성은 왜 해 둘레를 타원으로 도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듬해 겨울 하늘에 큰 혜성이 나타나자, 그는 천문학자 존 플램스티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혜성을 살폈습니다.
그는 답을 찾았습니다. 해가 행성을 당기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면, 행성은 타원을 그리며 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뉴턴은 이 증명을 아홉 장 남짓한 원고로 적어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왕립학회에 보냈고, 원고는 1684년 12월 학회 기록부에 옮겨 적혔습니다.
그 아홉 장이 씨앗이 되어, 1687년 7월 5일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나왔습니다. 핼리가 출판을 북돋우고 돈까지 댔습니다.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를 도는 달이 같은 힘, 곧 만유인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수학으로 보인 이 책에는,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운동의 세 가지 법칙도 담겼습니다.
계란 대신 시계
한 문제에 빠지면 다른 것은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배가 고파 하인에게 계란을 가져오라 해 놓고는, 문제를 푸느라 끓는 냄비에 계란 대신 시계를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대표해 국회의원을 지냈을 때도 그랬습니다. 성격이 조용해 의원 생활에 잘 녹아들지 못했고, 1년 동안 의회에서 한 말이 수위에게 한 「문 좀 닫아 주시오」 한마디뿐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술집에 숨어든 조폐국장
쉰을 넘긴 1696년, 뉴턴은 대학을 떠나 런던의 왕립 조폐국, 곧 나라의 동전을 만드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699년에는 조폐국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름만 걸어 두는 한가한 자리로 여겨졌지만, 뉴턴은 일을 깐깐하게 했습니다. 당시 거둬들인 동전의 다섯에 하나가 가짜일 만큼 위조가 흔했습니다. 뉴턴은 술집 단골로 변장해 직접 증거를 모았고, 1년 반 사이 증인과 용의자를 100번 넘게 심문해 위조범 28명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1703년에는 영국 과학자들의 모임인 왕립학회의 회장이 되었고, 1705년에는 앤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조폐국에 있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영국 동전의 무게와 품질을 고르게 다듬었습니다.
토끼를 먹지 않은 과학자
뉴턴은 일을 건강보다 앞에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아꼈습니다. 같은 시대 사람들은 그가 토끼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목을 졸라 잡는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피로 만든 순대도 먹지 않았습니다.
입맛 때문이 아니었다고 조카딸은 말했습니다.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은 잔인하고, 피를 먹으면 사람이 거칠어진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의 서재도 뜻밖입니다. 지금 확인되는 책 1,752권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신학책으로 477권이었고, 다음이 연금술 책 169권이었습니다. 수학책은 126권, 물리학책은 52권, 천문학책은 33권뿐이었습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과학 분야의 책을 다 합쳐도 12%가 채 안 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공책
뉴턴이 평생 남긴 글은 1천만 단어쯤으로 어림됩니다. 그 절반 넘게가 신학과 연금술, 곧 쇠붙이를 금으로 바꾸려던 옛 화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연금술 글만 100만 단어쯤 됩니다.
1672년부터 그는 성경 연구를 공책에 적었는데, 이 공책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72년이 되어서입니다. 공책 속 뉴턴은 교회가 믿는 삼위일체, 곧 하느님과 예수와 성령이 하나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 역사학자가 그를 「이단자」라고 부르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름난 성경 학자로 존경받았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가장 높은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그에게 「당신은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신학을 더 많이 안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경매에 나온 연금술 원고
뉴턴이 죽고 200년도 더 지난 1936년, 그의 후손이 연금술 원고를 런던의 경매 회사 소더비에 내놓았습니다. 원고는 여러 사람에게 흩어져 모두 9,000파운드쯤에 팔렸습니다.
경매에 참가한 서른여 명 가운데에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있었습니다. 케인스는 그 뒤로도 흩어진 원고를 사 모아, 뉴턴의 연금술 원고 절반쯤을 다시 한데 모았습니다. 그리고 1946년, 그것을 모두 케임브리지 대학에 기증했습니다.
오늘날 뉴턴의 연금술 글은 미국 인디애나 대학이 모두 인터넷에 올리고 있습니다. 만유인력과 빛의 색과 미적분의 뉴턴 뒤에, 30년쯤 사람들 눈을 피해 연금술을 붙든 또 한 사람의 뉴턴이 있었던 셈입니다.
주식으로 잃은 2만 파운드
조폐국장 뉴턴은 돈을 다루는 일에도 밝았지만, 투자에서는 크게 데었습니다. 1720년 무렵, 남해 회사라는 무역 회사의 주식값이 하늘로 치솟다가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이 회사에 돈을 넣었던 뉴턴은 적어도 1만 파운드, 어쩌면 2만 파운드 넘게 잃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 전에 이미 부자였기에,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재산은 3만 파운드쯤이었습니다.
1727년 3월 31일, 뉴턴은 여든넷의 나이에 잠든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나라가 장례를 치러 주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뉴턴
운명 앱 풀이는 뉴턴을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강인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풉니다. 흑사병으로 학교가 닫혀도 시골집에서 혼자 2년을 한 문제에 매달린 사람, 변장까지 하며 위조범을 끝까지 쫓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산」은 잘 어울립니다. 다만 비판 한 번에 토론장을 떠나 버린 그를 두고 「의리」를 말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아이작 뉴턴」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