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이금
조선 21대 임금. 52년 동안 다스리며 탕평책을 폈다.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戊흙 | 甲나무 | 甲나무 |
| ? | 寅호랑이 | 戌개 | 戌개 |
운명 앱 풀이 — 「산처럼 든든하면서도 그 안에 호랑이의 역동성을 품고 있는 사람이세요.」
음력 1694-09-13 (양력 1694-10-31)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3 · 불 0 · 흙 3 · 쇠 0 · 물 0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불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궁 밖에서 자란 왕자
영조는 1694년 음력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궁궐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궁 밖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1699년 12월 24일, 그는 「연잉군」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임금의 아들 가운데 왕비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난 아들에게 붙이던 이름입니다.
그 무렵 궁궐의 벼슬아치들은 두 패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노론」과 「소론」이라는 이름의 두 무리는 다음 임금을 누구로 세울지를 두고 목숨을 건 다툼을 벌였고, 연잉군은 어려서부터 그 한가운데에 놓였습니다.
흰 여우 사냥
형 경종이 임금이 된 뒤인 1721년 음력 8월, 노론의 요청으로 연잉군은 임금의 뒤를 이을 아우, 곧 「왕세제」가 되었습니다.
그해 궁궐에 흰 여우가 나타나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소론 쪽 사람들은 여우를 잡는다는 핑계로 연잉군을 해치려 했습니다. 위험을 느낀 연잉군은 양어머니인 대비에게 몸을 피해 도움을 청했고, 임금에게는 차라리 평범한 백성으로 살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쉰 명의 목숨
얼마 뒤 목호룡이라는 사람이 노론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했습니다. 경종은 이를 계기로 조정을 한꺼번에 뒤엎었고, 연잉군을 받치던 노론의 대신 넷,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비롯해 50여 명의 높은 벼슬아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가족들도 귀양을 가거나 갇혔습니다.
든든한 편을 잃은 연잉군의 자리는 위태로웠습니다. 1722년에는 김일경 등이 시킨 박상검과 문유도의 음모로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래도 노론과 소론 가운데 온건한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고, 몸이 약한 경종도 그를 감싸 주어 그는 겨우 자리를 지켰습니다.
게장과 감, 그리고 소문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갑자기 병이 나 배앓이와 설사를 되풀이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지기 전 경종은 게장과 꿀, 감, 인삼차 등을 수라로 들었습니다. 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영조가 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해 음력 8월 30일, 연잉군은 창덕궁 인정문에서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독살 소문은 그가 다스린 50여 년 내내 꼬리처럼 따라붙었습니다.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악성 소문까지 누군가 일부러 퍼뜨렸습니다.
고르게 쓰겠다는 약속
목숨을 위협받으며 패거리 싸움을 겪은 영조는 그 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론을 몰아냈지만, 노론 혼자 힘이 세지는 것도 걱정해 소론 일부를 다시 썼습니다. 소론을 모두 역적으로 죽이자는 노론 강경파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727년, 그는 노론의 강경파를 내쫓고 두 패에서 고르게 사람을 뽑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탕평책」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사람을 쓰겠다는 정책으로, 그는 이를 다스림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비 오는 새벽의 자책
1728년, 이인좌가 경종의 죽음을 핑계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난을 누른 뒤 어느 이른 새벽, 빗소리에 잠을 깬 영조는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아아! 지난 4년 동안 홍수와 가뭄, 굶주림이 있었던 것은 나의 덕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에 없던 반란까지 겪었다.」
그는 차가운 비가 논밭을 덮칠까 걱정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애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의 마음을 얻겠는가?」 그는 세금을 줄이라고 명하고, 자기 밥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였습니다.
경상도에 내린 벌
반란군이 경상도에서 가장 크게 일어났다는 까닭으로, 영조는 경상도를 반역의 고장으로 정했습니다. 그곳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보지도, 벼슬에 나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구의 관청에는 경상도를 평정했다는 비석까지 세웠습니다.
그러나 안동과 예천, 대구의 선비들은 스스로 의병을 꾸려 난을 막는 데 나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충청도 사람인 이인좌를 「경상도 도적」이라 부르는 것이 원통하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영조는 그 지역 사람들도 여럿 난에 가담했다며 이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군포 두 필을 한 필로
영조는 가혹한 형벌을 없애거나 고쳤고,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직접 두드려 알릴 수 있는 북, 신문고를 되살렸습니다. 술을 금해 사치를 막고 농사를 북돋웠으며, 굶주린 백성의 형편을 조사해 구해 주었습니다.
가장 큰 일은 균역법이었습니다. 그 무렵 백성은 군대에 가는 대신 해마다 베 두 필을 나라에 냈는데, 영조는 이것을 한 필로 줄였습니다. 백성의 세금 짐이 크게 가벼워졌습니다. 그 자신도 적게 먹고 물건을 아끼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약 그릇 앞의 아들
1752년, 영조는 병석에 누워 아들 사도세자에게 나랏일을 대신 맡겨 보았습니다. 세자는 노론의 말만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썼습니다. 그러자 노론은 세자의 생각이 그릇되었다고 영조에게 일러바쳤습니다.
영조는 약을 들고 온 사람을 이런저런 트집으로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세자는 문밖에 꼼짝 않고 서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약을 권하라고 재촉하자 세자는, 아버지가 약을 물리치는 것은 자기 허물 때문이니 권할 면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조는 그만한 꾸중도 못 견디느냐며 몹시 언짢아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몰래 다녀온 평안도
1762년 음력 4월,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알리지 않고 평안도에 다녀왔습니다. 동궁에 세자가 없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는 직접 가 보려다 망설였고, 그사이 세자는 말을 달려 며칠 만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음력 6월,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의 잘못을 열 가지 넘게 늘어놓은 글을 올렸습니다. 영조는 크게 노해, 이런 일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꾸짖었습니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세자를 향한 영조의 의심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뒤주
1762년 7월 4일, 영조는 세자를 불러 그 자리에서 내쫓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고, 휘령전 앞의 쌀 담는 나무 궤짝, 뒤주 속에 가두었습니다. 누군가 뒤주 틈으로 미음과 물을 넣어 준다는 것을 알자,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 바람이 통하지 않게 막았습니다.
세자는 그로부터 사나흘 만에 뒤주 안에서 굶어 죽었고, 갇힌 지 여드레 뒤인 7월 12일 그 죽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붓을 빼앗긴 사관
늘그막의 영조는 손자, 훗날의 정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려 했지만 신하들이 말렸습니다. 그래서 1774년 손자에게 나랏일을 대신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의 우두머리들이 임금의 말을 받아 적는 관리들을 가로막고 붓까지 빼앗으며 막아섰습니다.
영조는 끝내 손자에게 일을 맡겼고, 곧이어 군대를 움직이는 권한까지 넘겨주었습니다. 1776년 음력 3월 5일, 그는 경희궁 집경당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든한 해 다섯 달을 살아 조선의 임금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고, 51년 7개월로 가장 오래 다스린 임금이었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영조
운명 앱 풀이는 영조를 「산처럼 든든하면서도 그 안에 호랑이의 역동성을 품고 있는 사람이세요」라고 풉니다. 흰 여우 사냥과 쉰 명의 처형을 지나 임금이 되고, 51년 넘게 자리를 지킨 그는 분명 산처럼 버틴 사람이었습니다. 군포를 반으로 줄이고 두 패에서 고르게 사람을 쓰려 한 데서는 그 든든함이 백성 쪽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사나움은 끝내 자기 아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뒤주 앞의 영조를 「역동성」이라는 말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영조」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