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
피뢰침을 발명하고 미국 독립선언에 참여한 정치가.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癸물 | 己흙 | 乙나무 |
| ? | 巳뱀 | 丑소 | 酉닭 |
운명 앱 풀이 — 「타오르는 불꽃 아래 깊이 흐르는 샘물처럼, 내면에 상반된 두 에너지를 조화롭게 품고 있어요.」
양력 1706-01-17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1 · 흙 2 · 쇠 1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쇠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양초 가게의 열다섯째 아이
벤저민 프랭클린은 1706년 1월 17일, 보스턴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사이어에게 그는 열다섯 번째 아이였고, 아들로는 열 번째이자 막내였습니다. 어머니 아비아는 그 집에서 낳은 열 남매 가운데 여덟째로 그를 낳았습니다.
책값을 벌어 준 채식
16세 무렵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트라이온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만났습니다. 그 책은 채식 식단을 권장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쇄소 견습생이었던 그는 이 책을 읽고 채식을 실천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자 형이 지급하는 급여의 절반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책을 사는 데 보탤 수 있는 추가 자금이 되었습니다.
채식에는 돈을 아끼는 것 외에 또 다른 장점도 있었습니다. 음식을 절제하며 먹으니 정신이 더 맑아지고 이해력도 빨라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할 때 보통 따라오는 이러한 이점 덕분에 더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중년 과부 「사일런스 도굿」
형 제임스가 펴내던 신문에 글을 싣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름을 숨기기로 했습니다. 그는 「사일런스 도굿」이라는 중년 과부 행세를 하며 가짜 이름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도굿 부인의 이름으로 실린 편지들은 신문에 게재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을 발행하던 형 제임스와 신문 독자들은 이 편지가 벤저민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 인기 있는 필자가 바로 남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제임스는 벤저민에게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엇갈린 약혼
열일곱 살이던 1723년, 형의 인쇄소에서 허락 없이 도망쳐 필라델피아로 간 프랭클린은 하숙하던 집의 열다섯 살 딸 데보라 리드에게 청혼했습니다. 데보라의 어머니는 런던으로 떠날 참이던 젊은이에게 딸을 주기를 망설였습니다.
런던으로 떠난 프랭클린은 데보라와 그녀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려 했지만, 예상만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데보라의 가족은 프랭클린이 오랫동안 침묵하는 것을 보고 그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보라의 어머니는 딸을 재촉했고, 결국 데보라는 1725년 8월 5일에 존 로저스라는 도기공과 결혼했습니다. 도기공은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결혼 직후 로저스는 빚을 갚지 않고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데보라의 지참금을 가지고 바베이도스로 도망쳤습니다. 로저스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데보라는 중혼법—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책을 한데 모으자
함께 연구를 진행하던 사람들은 토론을 할 때마다 책을 자주 참고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각자가 가진 책을 한곳에 모아두면 필요할 때마다 함께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한데 모으는 공동 도서관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프랭클린은 구성원들이 돈을 모아 책을 사고, 그 책을 모두가 함께 읽는 구독형 도서관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각자가 책을 모두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큰 이점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훗날 필라델피아 도서관 회사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랭클린은 1731년에 이 회사의 헌장, 즉 운영 규칙을 담은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뼈아픈 후회
1736년, 네 살 된 아들 프랭키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는 설사 증세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부모는 아이가 몸을 회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종두법을 시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종두법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미리 약하게 만든 병균을 몸에 넣는 시술입니다. 아들이 죽자 종두법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아이가 종두법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소문을 듣고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공고를 냈습니다. 그는 「나는 내 아이가 종두법을 받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감염 방식으로 병을 얻었음을 진심으로 선언합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종두법을 시행할 의도가 있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을 통해, 종두법을 하지 않은 것을 오랫동안 뼈저리게 후회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종두법을 시행하다 아이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며 시술을 피하는 부모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했습니다. 그는 「그 후회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일 수 있으니, 더 안전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례를 남겼습니다.
전기로 구운 칠면조
1749년 봄, 벤저민 프랭클린은 전기를 인류를 위해 실용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실험들이 인류를 위한 실질적인 쓰임새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 낙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기를 이용해 칠면조를 전기 충격으로 죽인 뒤, 전기 회전 구이용 꼬챙이로 구워내는 실용적인 시연을 계획했습니다. 여러 마리를 그렇게 요리해 본 그는 「이렇게 잡은 새는 유난히 연하다」고 적었습니다.
실험을 이어가던 중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프랭클린은 두 개의 라이덴 병을 다루는 과정에서 전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라이덴 병은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유리 용기인데, 이 사고로 인해 그의 양팔에는 한 저녁 내내 감각이 없는 마비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일에 대해 「이토록 이름난 실수를 저질러 부끄럽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구름에서 불꽃을 끌어내다
1752년 6월 15일, 필라델피아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연을 이용한 실험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폭풍우가 치는 하늘로 연을 날렸습니다. 프랭클린은 전기 충격의 위험을 피하고자 지붕 아래에서 몸을 말린 채, 전기가 통하지 않게 막아주는 절연체 위에 조심스럽게 서 있었습니다. 그는 연이 직접 번개에 맞기를 기다리는 위험한 방식 대신, 먹구름으로부터 전기를 모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그는 구름으로부터 전기 불꽃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랭클린은 10월 19일 자신의 신문인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이 실험 내용을 글로 남겼는데, 이때 자신이 직접 실험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 기록은 영국 왕립학회에 읽혔고, 1767년 조셉 프리스트리에 의해 더 자세한 내용이 담긴 기록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우편선은 왜 늦었나
영국에 머물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우편물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뉴욕에 도착할 때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뉴욕으로 가는 우편선들은 일반 상선보다 도착이 몇 주씩 늦어지는 일이 잦았습니다. 프랭클린은 사촌인 티모시 폴거에게 이 문제를 물었습니다. 폴거는 낸터킷의 포경선 선장이었는데, 그는 상선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한 해류를 일부러 피해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우편선들은 시속 3마일, 즉 시속 5킬로미터의 속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해류를 정면으로 맞으며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폴거를 비롯한 경험 많은 선장들과 함께 이 해류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선장들에게서 배운 정보를 바탕으로 해류의 흐름을 기록한 도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에 「멕시코 만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770년 영국에서 이 도표를 처음 발표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훗날 영국 선장들이 프랭클린의 조언을 따라 이 해류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항해 시간을 2주나 줄일 수 있었습니다.
찬성과 반대의 저울
177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결정을 내릴 때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반으로 나누어 선을 긋고, 한쪽 칸에는 찬성하는 이유를 뜻하는 '프로(Pro)'를, 다른 쪽 칸에는 반대하는 이유를 뜻하는 '콘(Con)'을 적었습니다. 그다음 3일이나 4일 동안 고민하며, 어떤 조치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게 만드는 여러 동기들을 짧은 메모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적힌 내용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아두면, 그는 각 이유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만약 양쪽에 하나씩 있는 두 이유가 서로 대등하다고 느껴지면 두 가지를 모두 지웠습니다. 찬성하는 이유 하나가 반대하는 이유 두 개와 무게가 같다면 세 가지를 모두 지웠습니다. 반대로 반대하는 이유 두 개가 찬성하는 이유 세 개와 무게가 같다면 다섯 가지를 모두 지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어느 쪽으로 무게가 기울어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 뒤, 하루나 이틀 정도 더 고민해도 양쪽에서 새로 떠오르는 중요한 내용이 없다면 비로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콕핏에서 들은 모욕
1774년 1월 29일, 런던 화이트홀에 있는 콕핏에서 영국 추밀원 산하 위원회의 심리가 열렸습니다. 콕핏은 당시 회의가 진행되던 장소입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대리인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곳에 참석하여 총독 토머스 허친슨과 부총독 앤드루 올리버를 해임해 달라는 매사추세츠 의회의 청원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청원은 식민지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한이 공개되며 영국 정부와 식민지 사이에 논란이 된 사건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영국의 법무차관 알렉산더 웨더번은 프랭클린을 비난했습니다. 웨더번은 프랭클린이 사적인 서한을 부당하게 입수하고 전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청원의 내용뿐만 아니라 프랭클린 개인의 도덕성과 명예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응수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독립의 서명자
1775년 미국으로 돌아온 프랭클린은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뽑혔습니다. 이어 1776년에는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기초위원에 임명되어 문서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했습니다.
프랭클린은 미국의 주요 역사적 문서들에 모두 이름을 남겼습니다. 1776년 독립선언서와 1778년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 1782년 영국과의 평화 조약, 그리고 1787년 미국 헌법에 모두 서명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프랑스에서 부르봉 공작부인과 체스 게임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공작부인은 수를 두다가 실수로 자신의 왕을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체스 규칙을 무시하고 곧장 그 왕을 잡아 버렸습니다. 체스에서 왕은 몰아넣기만 할 뿐 잡아서 판에서 들어내지는 않습니다. 당황한 공작부인은 「아, 우리는 그렇게 왕을 잡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지켜 낼 수 있다면」
1787년, 미국 헌법을 만들기 위해 모인 제헌회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토론에 자주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비만으로 인해 통풍을 포함한 여러 건강 문제를 겪고 있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던 중 엘리자베스 윌링 파월이 프랭클린에게 그들이 어떤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부인, 만약 당신들이 그것을 지켜낼 수 있다면 공화국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공화국은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가진 정치 형태를 말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1790년 4월 17일, 필라델피아에 있는 집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84세였습니다. 폐에 생긴 농양, 즉 고름이 찬 주머니가 터지면서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토해냈고, 호흡 기관이 점차 압박을 받으며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밤 11시경, 그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딸은 숨을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침대에서 자세를 바꾸어 옆으로 누워보라고 권유했습니다. 프랭클린은 딸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쉽게 할 수 없단다.」
운명 앱으로 본 프랭클린
운명 앱 풀이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타오르는 불꽃 아래 깊이 흐르는 샘물처럼, 내면에 상반된 두 에너지를 조화롭게 품고 있어요」라고 풉니다. 폭풍우 속에 연을 띄워 구름에서 불꽃을 끌어내던 호기심이 불꽃이라면, 종이를 반으로 갈라 찬반의 이유를 하나씩 지워 가며 결정을 내리던 버릇은 차분한 샘물에 가깝습니다. 두 모습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었다는 점에서 풀이는 그와 잘 맞습니다. 다만 아들을 잃은 뒤 평생 후회했다는 고백을 보면, 그 조화가 늘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벤저민 프랭클린」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34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