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732–1799

조지 워싱턴

미국 독립전쟁을 이끈 초대 대통령.

차례
  1. 아버지와 멀었던 맏아들
  2. 사교를 위한 백 가지 규칙
  3. 젊은 측량사의 첫 임무
  4. 하나뿐인 바다 건너 여행
  5. 「마을을 삼키는 자」
  6. 잘못 번역된 항복 문서
  7. 총알이 뚫고 지나간 코트
  8. 스물여섯 살의 결혼
  9. 몬머스, 그리고 불탄 마을들
  10.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11. 노새를 믿은 농장주
  12. 만장일치의 대통령 당선
  13. 임금 같은 대통령
  14. 위스키 반란을 진압하다
  15. 나무가 아니었던 틀니
  16. 세 번째 임기를 마다하다
  17. 「괜찮네」
  18. 운명 앱으로 본 워싱턴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乙나무壬물壬물
?酉닭寅호랑이子쥐

운명 앱 풀이 — 「부드러운 넝쿨이 단단한 금속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유연함 속에 강인한 원칙을 품은 분이세요.」

양력 1732-02-22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2 · 불 0 · 흙 0 · 쇠 1 · 물 3 — 기운이 센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쇠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아버지와 멀었던 맏아들

조지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의 포프스 크리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오거스틴과 어머니 메리 볼 사이에 난 여섯 남매의 맏이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첫 아내 제인 버틀러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넷 더 있었는데, 둘은 어려서 죽고 로렌스와 오거스틴 두 형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가깝지 않아 훗날에도 아버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어머니와는 자주 부딪쳤습니다. 형제 가운데에서는 배다른 형 로렌스를 유난히 따랐습니다. 174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열한 살의 조지는 페리 농장과 노예 열 명을 물려받았습니다.

사교를 위한 백 가지 규칙

10대 시절의 조지 워싱턴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형들이 영국에 있는 애플비 문법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그는 하트필드에 있는 로워 처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수학과 토지 측량을 배웠고, 그림을 그리거나 지도를 만드는 재능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다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워싱턴은 사교를 위한 규칙을 정리하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프랑스 가이드북을 영어로 번역한 책을 본떠서 「사교를 위한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100가지가 넘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예절과 행동 방식을 정리한 것입니다.

젊은 측량사의 첫 임무

1749년 늦은 7월, 버지니아의 포토맥 강가에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17세였던 조지는 이곳에서 첫 번째 측량기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측량기사는 땅의 경계를 재고 지형을 조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500만 에이커의 영토를 소유한 토마스 페어팩스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 직책은 페어팩스 경과 그의 사촌인 윌리엄 페어팩스의 명령 아래 보장되었습니다.

조지는 이 해에 처음으로 공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새로 생긴 컬페퍼 카운티의 측량기사라는 직함을 맡은 것입니다. 그는 측량기사로 활동하며 버지니아 식민지의 지형에 대해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뿐인 바다 건너 여행

1751년, 조지 워싱턴은 북미 대륙을 떠나 바베이도스로 향했습니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유일한 해외 여행이었습니다. 형 로렌스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그곳의 기후를 빌려보고자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령 대서양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이곳에서 버지니아 너머의 플랜테이션 사회와 제국 행정의 모습들을 접했습니다.

하지만 여행 중에 워싱턴은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천연두는 피부에 흉터를 남기는 전염병인데, 워싱턴의 얼굴에는 이로 인해 약간의 흉터가 남았습니다. 대신 그는 이 병을 앓음으로써 나중에 다시 감염되지 않는 면역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을을 삼키는 자」

1753년 10월, 로그스타운에서 조지 워싱턴은 호데노쇼니 연맹의 지도자인 타나카리손을 만났습니다. 당시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부지사 로버트 딘위디로부터 특별 사절로 임명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땅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도록 요구하고, 호데노쇼니 연맹과 평화를 맺으며 프랑스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만남에서 타나카리손은 워싱턴에게 '코노토카우리어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마을을 삼키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명칭은 17세기 후반에 서스쿼해너 부족이 워싱턴의 증조할아버지인 존 워싱턴에게 붙여주었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잘못 번역된 항복 문서

1754년 7월 3일, 900명의 프랑스 군대가 니세서티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이어진 전투 끝에 워싱턴은 항복했습니다. 그는 항복 문서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워싱턴이 주몽빌을 '암살'했다는 책임을 지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주몽빌은 영국에 외교 메시지를 전달하던 프랑스 지휘관이었습니다. 나중에 워싱턴은 번역가가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며 번역가를 탓했습니다. 이 주몽빌 사건은 프랑스-인디언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코트

1755년,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원정을 떠났을 때 조지 워싱턴은 그의 부관으로 자원했습니다. 워싱턴은 군대를 두 개의 부대로 나누는 방안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노가헬라에서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이 매복 공격을 가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브래독 장군은 전사했고, 영국군 병력의 3분의 2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워싱턴은 타고 있던 말 두 마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겪었습니다. 총알이 그의 모자와 코트까지 뚫고 지나갔습니다. 워싱턴은 살아남아 토마스 게이지 중령의 지휘 아래 생존자들을 모으고 후방 경계 부대를 형성했습니다. 이 행동 덕분에 그는 포트 네세서티 전투에서 지휘를 잘못했다며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의 결혼

1759년 1월 6일, 스물여섯 살의 워싱턴은 부유한 농장주의 스물일곱 살 과부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했습니다. 마사는 영리하고 상냥했으며 큰 농장을 꾸려 본 경험도 있었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부부는 마운트버넌에 살며 담배와 밀을 길렀습니다. 결혼으로 워싱턴은 커스티스 집안의 땅 1만 8,000에이커 가운데 마사 몫인 3분의 1을 맡게 되었고, 나머지는 마사의 아이들을 위해 관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버지니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몬머스, 그리고 불탄 마을들

1778년 6월, 필라델피아를 버리고 뉴욕으로 물러나던 영국군을 워싱턴은 몬머스에서 들이쳤습니다. 장군 리와 라파예트가 그 몰래 4,000명을 이끌고 먼저 공격했다가 일을 그르쳤고, 워싱턴은 리를 물리고 큰 싸움 끝에 겨우 비겼습니다. 이 싸움 뒤로 북부와 중부에서의 전투는 끝났고, 워싱턴은 그 뒤 3년 넘게 영국군과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영국군의 눈길은 남쪽으로 옮겨 가, 1778년 말 남부의 큰 항구 조지아주 서배너를 점령했습니다. 그사이 워싱턴은 영국 편에 선 원주민 이로쿼이 연맹을 치는 원정을 명령했고, 원정대는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1783년 전쟁이 끝났습니다.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받을 때까지 군대를 이끌었던 워싱턴은 이제 전쟁터가 아닌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권력을 쥐는 대신 농장에서 개인적인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노새를 믿은 농장주

전쟁을 마치고 마운트버넌으로 돌아온 워싱턴은 공적인 삶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거주지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저택의 모습으로 바꾸는 개축 작업을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정 상황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채권자들은 가치가 떨어진 전쟁 통의 화폐로 돈을 갚았고, 그는 세금과 임금으로 갚아야 할 상당한 금액의 빚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운트 버넌은 수익을 내지 못했습니다. 병충해와 나쁜 날씨 때문에 농작물 수확량은 계속해서 좋지 않았습니다. 1787년의 기록을 보면 그의 영지는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워싱턴은 농장을 다시 수익성 있게 만들기 위해 새로운 조경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빨리 자라는 나무와 토착 관목들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1785년에 스페인 국왕 찰스 3세로부터 씨수말을 선물 받은 뒤 노새를 번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노새가 농업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장일치의 대통령 당선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당시 대통령 지명권을 가진 선거인단은 13개 주에서 선출되었습니다. 그중 연방제에 반대하여 선거인단을 지명하지 못한 뉴욕주를 제외한 12개 주에서 69명의 선거인단이 모였습니다. 선거인단은 각각 2표씩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표씩 조지 워싱턴에게 투표하였습니다. 이로써 워싱턴은 미국 역사에서 단 한 번뿐인 만장일치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선거인단들의 나머지 표는 다른 11명의 후보에게 나누어 주어졌습니다. 그중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존 애덤스는 당시 헌법에 따라 미국의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임금 같은 대통령

한국어 위키백과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아직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의 워싱턴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는 스스로를 국민이 뽑은 임금처럼 여기고 임금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국왕들이 자신을 가리킬 때 쓰는 3인칭 표현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국왕들처럼 위엄 있는 몸가짐을 갖추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유럽 대륙의 왕실을 본받아 접견회와 파티를 계속해서 열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왕들처럼 미국 전역을 호화롭게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국민들은 마치 국왕을 맞이하는 것처럼 화려한 축하 행사를 열어 그를 환영했습니다.

위스키 반란을 진압하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서부 농민들은 곡물을 운송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곡물로 위스키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런데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이 연방 정부의 재정 수입을 늘리려고 주류에 연방세를 부과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던 농민들이 1794년 위스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연방 정부가 세워진 후 맞이한 첫 번째 시련이자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주 민병대를 소집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는 반란군들을 완전히 분쇄하며 공권력이 얼마나 엄중하고 단호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나무가 아니었던 틀니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조지 워싱턴은 심한 치아 부식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단 하나의 치아를 제외하고 모든 이를 잃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세트의 틀니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흔히 틀니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금속과 상아, 뼈, 동물의 치아, 그리고 노예에게서 얻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치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치아 문제 때문에 그는 늘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라우다넘을 사용했습니다. 라우다넘은 아편을 주성분으로 하는 약물입니다.

세 번째 임기를 마다하다

1797년,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친 워싱턴에게 사람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헌법에 임기 제한 조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3선 권유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만약 자신이 세 번째 임기를 맡게 된다면 장기 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 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대통령은 두 번까지만 임기를 수행한다는 관례가 생겼습니다.

대통령직을 떠나며 그는 고별사를 발표했습니다. 워싱턴은 이 글에서 무엇보다 국가의 통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미국민들에게는 정당 간의 극심한 대립을 경계하라고 말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지나치게 종속되는 것과 외국에 대해 과한 적대감을 갖는 것을 경계하라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괜찮네」

1799년 12월, 워싱턴은 목이 심하게 부어 숨쉬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의사들은 그 무렵의 치료법대로 피를 뽑았는데, 뽑은 피는 다섯 파인트에 이르렀습니다. 한 의사가 목에 구멍을 내 숨길을 트자고 했지만 다른 의사들은 그 수술을 몰라 반대했습니다.

워싱턴은 의사 둘을 방에서 내보내고, 남은 의사 크레이크에게 말했습니다. 「의사 양반, 나는 쉽게 죽지 못하는구먼. 하지만 가는 게 두렵지는 않네.」 1799년 12월 14일 밤 10시에서 11시 사이, 마사가 침대 발치에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지막 말은 「괜찮네」였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워싱턴

운명 앱 풀이는 조지 워싱턴을 「부드러운 넝쿨이 단단한 금속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유연함 속에 강인한 원칙을 품은 분이세요」라고 풉니다. 열 몇 살에 백 가지가 넘는 예절 규칙을 베껴 적으며 스스로를 다듬은 소년, 그리고 모두가 붙잡는데도 세 번째 임기를 끝내 마다한 대통령은 이 풀이와 잘 맞습니다. 다만 그의 원칙이 늘 단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어를 몰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위스키에 매긴 세금에 맞선 농민들에게는 군대를 이끌고 나섰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조지 워싱턴」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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