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를 쓴 독일의 작가.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壬물 | 壬물 | 己흙 |
| ? | 戌개 | 申원숭이 | 巳뱀 |
운명 앱 풀이 — 「지성과 믿음이 함께 있어서, 흐르다가도 한번 머문 자리는 깊게 지키는 분이에요.」
양력 1749-08-28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0 · 불 1 · 흙 2 · 쇠 1 · 물 2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쇠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재단사였던 할아버지
괴테의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괴테는 1687년 튀링겐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성의 철자를 괴테로 바꾸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는 처음에는 재단사로 일했습니다. 재단사는 옷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후 그는 선술집을 열었습니다. 선술집은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를 말합니다.
그가 선술집을 운영하며 쌓은 재산은 후손들에게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그가 벌어들인 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그 재산 덕에 프랑크푸르트의 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바로 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책의 첫 문장을 외우던 아이
어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항상 그 책의 시작 부분이나 작품의 구성을 통째로 외우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세 오경의 다섯 권을 외웠고, 그다음에는 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외웠습니다.
상상력이 너무 활발해져서 허구와 역사, 신화와 종교가 뒤섞인 이야기들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 때면 그는 이 습관을 활용해 도피처를 찾았습니다. 그는 모세의 첫 권들을 펼쳐 들고 그 동양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목자 부족들 사이에서 그는 가장 큰 고독과 가장 큰 사회를 동시에 경험했습니다.
프랑스 군대의 인형극에 매료되다
7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괴테의 고향은 프랑스 군대에 점령되었습니다. 군인들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매년 인형극을 준비하여 공연했습니다. 어린 괴테는 이 인형극에 깊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인형극은 작은 인형을 조종하여 움직이게 만드는 연극을 말합니다.
이 인형극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문학 작품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연극에도 큰 애정을 보였습니다. 당시 괴테는 아버지와 개인 교사들로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같은 여러 언어를 배웠습니다. 또한 춤과 승마, 그리고 검술을 배우며 다양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법학 공부를 거부한 반항아
1765년부터 1768년까지 괴테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법률 규칙을 통째로 암기하는 일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법을 배우는 과정이 그에게는 즐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신 그는 대학 교수이자 시인이었던 크리스티안 퓌르히테고트 겔러트의 강의를 듣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법전의 딱딱한 문구들을 외우는 것보다 시를 쓰는 사람의 수업에 참여하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은 법학도보다는 시인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장인이자 여관 주인의 딸인 안나 카타리나 쇤코프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밝은 시들을 로코코 양식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열병과 함께 찾아온 귀향
법학 공부를 위해 떠났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학업에 큰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습니다. 결국 괴테는 1768년 8월 말,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괴테는 곧 심한 병을 앓았습니다. 이후 1년 반 동안 병세가 여러 차례 나빠지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도 나빠졌다고 합니다.
병을 회복하는 동안에는 어머니와 누이가 괴테를 간호했습니다. 몸을 추스른 괴테는 1770년 4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이번에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로 떠났습니다.
헤르더가 건넨 셰익스피어
1770년,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떠난 괴테는 그곳에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헤르더는 괴테가 문학 분야에서 개인적인 각성을 경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는 괴테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오시안, 그리고 민요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헤르더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 접한 괴테는 문학적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후 괴테는 1772년 10월 14일, 부모님의 집에서 첫 번째 독일 '셰익스피어의 날'을 기념하는 모임을 열기도 했습니다.
베르테르가 태어난 베츨라르
1770년 10월, 제센하임 마을로 여행을 떠났던 괴테는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은 1771년 8월에 끝이 났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환영과 이별」, 「제센하임의 노래」, 「들꽃 장미」와 같은 시들을 썼습니다. 이후 괴테는 문학 잡지의 편집자로서 얻는 수입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772년 5월, 그는 베츨라르에서 다시 법률가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츨라르에서 보낸 시간 동안 괴테는 샤를로테 부프와 그 약혼자 요한 크리스티안 케스트너를 알게 되었습니다. 1774년, 그는 그곳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습니다.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시에는 저작권법 같은 보호 장치가 거의 없었기에 괴테에게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상적인 여인을 향한 동경
1776년,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녀는 괴테보다 일곱 살이 많은 결혼한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유대는 1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 유대는 괴테의 삶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 괴테는 샤를로테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이탈리아로 떠나 버렸습니다. 당시 샤를로테는 정서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다시 화해했습니다.
코끼리 두개골이 알려준 비밀
1784년, 괴테는 자연 과학 연구에 몰두하며 형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사무엘 토마스 폰 젬메링에게 빌린 코끼리 두개골을 앞에 두고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위턱 앞쪽 가운데에 있는 작은 뼈, 「사이턱뼈」가 사람에게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괴테는 고대 해부학자들이 이 뼈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괴테는 코끼리 두개골을 면밀히 살피며 연구하던 중, 사람에게도 사이턱뼈가 있다는 것을 혼자 힘으로 찾아냈습니다. 사실 몇 해 앞서 프랑스의 두 학자가 다른 방법으로 먼저 찾아낸 뼈였습니다. 이 뼈는 이후 '괴테의 뼈'라고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뼈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젖먹이 동물에게 있다는 것을 처음 보인 사람은 괴테였습니다.
그가 발견의 실마리를 얻었던 코끼리 두개골은 '괴테의 코끼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두개골은 현재 독일 카셀에 있는 오토네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태양을 찾아 떠난 이탈리아 여행
1786년부터 1788년까지 괴테는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과거에 아버지가 이와 비슷한 여행을 했던 것이 괴테에게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요한 요아힘 빈켈만이라는 인물의 연구로 인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괴테에게 이번 여행은 마치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와도 같은 성격을 띠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괴테는 화가인 안젤리카 카우프만과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을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레이디 해밀턴과 알레산드로 카글리오스트로 같은 유명한 인물들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괴테는 시칠리아까지 여정을 이어갔는데, 그는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탈리아를 전혀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시칠리아는 모든 것의 실마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서 괴테는 로마 양식이 아닌 진짜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을 처음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건축이 가진 상대적인 단순함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당시 빈켈만은 이 두 양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실러와의 운명적인 만남
1788년 처음 서로를 알게 된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며 조심스러운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1794년이 되자 프리드리히 실러가 괴테에게 우정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협력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이 관계는 실러가 사망한 180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의 협력은 독일 고전주의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침입한 군대와 밤의 사투
1806년 10월 13일, 나폴레옹의 군대가 바이마르 마을을 침입했습니다. 규율이 가장 엉망인 프랑스 병사들, 이른바 「숟가락 부대」가 괴테의 집을 점령했습니다. 이들은 집 안으로 들이닥쳐 술을 마시고 큰 소란을 피우며 집주인을 불러댔습니다. 괴테는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가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괴테의 비서 리머는 괴테의 위엄 있는 모습과 영적인 분위기가 병사들에게조차 인상을 남긴 듯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깊은 밤, 병사들은 총검을 뽑아 들고 괴테의 침실까지 들이닥쳤습니다. 괴테가 겁에 질려 있는 사이, 연인인 크리스티아네가 큰 소리를 내며 병사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괴테의 집에 피신해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달려 나와 함께 저항했습니다. 결국 약탈하던 병사들은 물러갔습니다.
프라우엔플란에 있는 괴테의 집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크리스티아네였습니다. 그녀는 약탈을 일삼는 병사들에 맞서 주방과 지하실을 바리케이드로 막아냈습니다. 괴테는 일기에 「불, 약탈, 무시무시한 밤……」이라고 적으며, 「굳건함과 운 덕분에 집을 지켜냈다」라고 남겼습니다. 여기서 굳건함은 크리스티아네가 보여준 모습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인정한 남자
1808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나폴레옹을 처음 만났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마주하자마자 「당신은 한 명의 남자군요!」 혹은 「자, 여기 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두 사람은 정치와 볼테르의 저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괴테의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언급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책을 일곱 번이나 읽었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괴테는 나폴레옹의 깨어 있는 지성과 부패한 옛 체제의 대안을 만들려는 그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괴테는 나폴레옹을 직접 만난 것이 「내 평생에 이보다 더 높고 즐거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며 그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괴테는 1808년 10월 14일,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레지옹 도뇌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훈장입니다.
일흔의 나이에 찾아온 사랑
1821년, 괴테는 죽음에 이를 뻔했던 심장 병에서 회복했습니다. 일흔두 살이 된 그는 울리케 폰 레베츠로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울리케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그리고 1823년, 그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울리케의 어머니가 반대해, 그는 끝내 청혼하지 못했습니다. 1823년 9월 5일, 카를스바트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괴테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여겼던 시 「마리엔바트 비가」를 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두 살 소년과의 대화
1821년, 괴테의 친구인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가 열두 살 소년 펠릭스 멘델스존을 소개했습니다. 칠십 대를 넘긴 괴테는 이 아이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멘델스존은 악보를 보고 바로 연주하거나 즉흥적으로 곡을 만드는 능력이 있었는데, 괴테는 이를 보고 「이 작은 아이가 즉흥 연주를 하고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실력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은 믿기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첼터가 「그래도 당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일곱 살 때의 모차르트를 듣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괴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가 지금 해내는 것을 그때의 모차르트와 견주면, 어른의 교양 있는 말과 아이의 옹알이만큼 차이가 납니다」
어둠을 거부한 마지막 외침
1832년 3월 22일, 괴테는 여든둘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사 카를 포겔은 괴테가 평소 모든 면에서 어둠을 싫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포겔은 괴테가 임종하는 방을 잠시 떠났었는데, 나중에 전해 듣기로 괴테의 마지막 말이 「더 많은 빛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포겔은 자신이 죽음의 순간에 방 안에 없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카를 빌헬름 뮐러의 기록에 따르면 괴테는 조금 더 구체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거실의 두 번째 창문 덮개도 열어서 더 많은 빛이 들어오게 해주게.」라고 말했습니다. 창문 덮개는 창문에 달아 빛을 가리거나 가두는 판을 말합니다. 토머스 칼라일 역시 1832년 7월 2일 보낸 편지에서 「내가 더 많은 빛을 얻을 수 있도록 창문 덮개를 열어주게!」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어떤 기록에서는 괴테가 죽기 약 한 시간 전, 시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창문을 열어라, 더 많은 빛을 얻게 해다오.」라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괴테의 마지막 말은 빛을 갈망하는 문장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운명 앱 풀이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지성과 믿음이 함께 있어서, 흐르다가도 한번 머문 자리는 깊게 지키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법률 규칙을 암기하는 일에는 거부감을 보였으나, 코끼리 두개골을 관찰하며 인간의 뼈 구조를 스스로 증명해낸 지적인 집요함은 풀이와 닮아 있습니다. 또한 실러와 만나 독일 고전주의를 꽃피우며 나눈 깊은 우정은 그가 머문 자리에서 보여준 단단한 신의를 뒷받침합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5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