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네덜란드의 화가.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丙불 | 乙나무 | 癸물 |
| ? | 申원숭이 | 卯토끼 | 丑소 |
운명 앱 풀이 — 「태양 아래 날카로운 금속이 빛나는 것처럼, 강렬한 존재감과 정밀한 분석력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에요.」
양력 1853-03-30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2 · 불 1 · 흙 1 · 쇠 1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한 해 먼저 떠난 형의 이름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쪽의 작은 마을 흐로트쥔더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테오도뤼스는 개신교의 한 갈래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습니다. 빈센트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그 이름은 꼭 한 해 전 같은 날 숨이 붙지 않은 채 태어난 형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빈센트는 이름난 미술상이었고, 그 아들 여섯 가운데 셋이 그림을 사고파는 일을 했습니다. 1857년 5월 1일에는 동생 테오가 태어났습니다. 평생 빈센트의 편지를 받아 주고 돈을 보내 준 바로 그 동생입니다. 빈센트는 훗날 자기 어린 시절을 「엄격하고 차갑고 메마른」 때였다고 적었습니다.
아버지보다 많이 번 스무 살
1869년 7월, 삼촌의 주선으로 빈센트는 헤이그의 미술상 구필 화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873년 런던 지점으로 옮긴 그는 일을 잘해, 스무 살에 이미 아버지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테오의 아내는 훗날 그해가 빈센트 일생에서 가장 좋은 한 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숙집 주인의 딸 외제니 루아예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그녀는 예전 하숙생과 몰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 뒤 빈센트는 점점 혼자가 되고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1875년 파리 지점으로 옮겨진 그는, 화랑이 그림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데 불만을 품다가 한 해 뒤 해고되었습니다.
수도승 같은 나날
1876년, 빈센트는 런던의 선교단체에서 일하며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의 조수로 생활했습니다. 그는 목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때로는 직접 설교도 했습니다. 이 시기 빈센트는 기독교에 몰두하며 점점 더 경건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마치 수도승과 같은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빈센트의 룸메이트였던 파울루스 반 괴를리츠는 빈센트의 식습관에 대해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빈센트는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을 했으며, 매우 검소하게 식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종교적인 삶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높은 담 앞에서 돌아선 80km
1880년 3월, 빈센트는 쿠리에르 마을에 있는 화가 쥘 브르통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는 80km에 달하는 먼 길을 직접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브르통은 당시 높은 보수를 받던 유명한 화가였습니다. 빈센트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빈센트는 브르통의 저택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을 마주하고 위축되었습니다. 브르통의 성공을 목격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다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브르통은 빈센트가 찾아왔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을 거절당한 청혼
1881년 8월, 과거 암스테르담에서 신세를 졌던 이모부 요하너스 스트리커르의 딸 코넬리아가 에턴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코넬리아는 빈센트보다 7살 연상이었고, 8살짜리 아들을 둔 미망인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녀와 함께 자주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빈센트는 모든 가족을 놀라게 하며 코넬리아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했습니다. 하지만 코넬리아는 「아니, 안 돼요, 절대로」라고 말하며 그의 청혼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코넬리아는 곧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습니다.
불꽃 속으로 내민 손
1881년 11월 말, 빈센트는 암스테르담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이모부 요하너스 스트리커르에게 다시 편지를 썼지만, 이모부는 그 편지가 공격적이라고 테오에게 설명했습니다. 코넬리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이모부 부부는 빈센트의 집요함이 역겹다고 적었습니다. 이모부는 빈센트에게 코넬리아의 거절을 받아들여야 하며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는 주로 빈센트에게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빈센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는 「내가 불꽃 속에서 내 손을 유지할 수 있는 동안 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엔과의 불행한 동거
1882년 1월 말, 빈센트는 시엔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시엔은 다섯 살짜리 딸을 키우고 있었으며 당시 임신 중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녀가 이전에 낳은 두 명의 아이가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시엔은 그해 7월 2일에 아들 빌럼을 낳았습니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빈센트에게 이들을 떠나보내라고 설득했습니다. 빈센트는 처음에는 반항하며 시엔과 아이들을 위해 도시 밖에 집을 얻어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883년에 이들을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마르호트의 독약
빈센트가 뉘넌에서 직조공과 오두막을 스케치하며 작업에 몰두하던 1884년 8월, 이웃에 살던 마르호트 베헤만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빈센트보다 열 살 연상이었는데,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는 현장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마르호트는 빈센트와 사랑에 빠졌고, 빈센트 역시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양가 어디에서도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르호트는 독극물인 스트리크닌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빈센트가 급히 그녀를 근처 병원으로 데려간 끝에 마르호트는 살아남았습니다.
여섯 번뿐인 따뜻한 밥
안트베르펜의 회화용품점 위층 방으로 이사한 빈센트는 빠듯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886년 2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지난해 5월부터 따뜻한 밥을 먹은 기억이 여섯 번뿐이라고 했습니다. 빵과 커피와 담배로 끼니를 때운 탓에 이가 흔들리고 아팠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의 작품이 침침하고 인기가 없다는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며 채색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림에 카민, 코발트블루, 파리스 그린 등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안트베르펜의 부둣가에서 일본에서 들어온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나무판 그림으로, 그는 훗날 이 그림들의 결을 자기 그림에 끌어들였습니다.
노란 집의 꿈과 장식
1888년 5월 1일, 빈센트 반 고흐는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 2번지에 있는 방 4개를 임대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가구가 없는 이 방의 월세는 15프랑이었으며, 몇 달 동안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노란 집의 주인인 조제프, 그리고 그의 처 마리 지누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반 고흐는 이곳을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노란 집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갤러리로 꾸미고자 했습니다. 갤러리는 미술 작품을 모아 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공간을 말합니다. 반 고흐는 《반 고흐의 의자》, 《아를의 방》, 《밤의 카페》, 《밤의 카페 테라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은 모두 《노란 집을 위한 장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갱과의 위태로운 동거
1888년 11월, 고갱은 빈센트 반 고흐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 아를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알리스캉에서 첫 공동 야외 작업을 하며 《알리스캉》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갱은 빈센트를 초상화로 남기기도 했으며, 빈센트는 고갱의 제안을 따라 기억에 의존해 《에턴 정원의 추억》 같은 상상력에 의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빈센트는 고갱을 존경하며 대등한 관계가 되기를 원했지만, 고갱은 오만하고 지배적인 태도를 보여 빈센트를 좌절시켰습니다. 이들은 자주 다투었습니다. 빈센트는 고갱이 자기를 두고 떠날까 봐 점점 두려워했습니다.
면도날로 자른 귀
1888년 12월 23일 저녁, 고갱과 말다툼을 벌인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환청을 들은 듯한 상태에서 면도날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왼쪽 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라내어 심한 출혈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상처를 붕대로 감고 잘린 귀를 종이에 싸서, 자신과 고갱이 자주 가던 사창가의 여성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17세 소녀 가브리엘 베를라티에는 이 귀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빈센트는 의식을 잃은 채로 경찰관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수련의인 펠릭스 레이가 그의 치료를 맡았습니다. 병원은 잘린 귀도 함께 가져왔지만, 레이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고 판단하여 접합 수술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병원에서는 그의 상태를 「온몸의 헛소리를 동반한 급성 조증」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고갱은 15년 뒤에 그날 밤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행동이 몇 차례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고갱의 말에 따르면 빈센트가 면도날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진술은 입증되지 않았으며, 빈센트가 귀를 자르게 된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빈센트는 이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밤하늘
귀를 자른 뒤 그는 몇 차례 정신 병원을 드나들었고, 한동안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지냈습니다. 병원 안의 복도와 정원, 라일락을 그렸고, 이 무렵의 그림 가운데 몇은 소용돌이치는 붓질로 가득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이 그런 그림입니다.
밖에는 사람이 따라붙는 짧은 산책만 허락되었습니다. 그는 그 길에서 사이프러스와 올리브나무를 그렸습니다. 그릴 거리가 모자라자 밀레 같은 화가의 그림을 자기 식으로 다시 그렸는데, 그는 그것을 연주자가 베토벤을 자기 식으로 연주하는 일에 견주었습니다.
「슬픔은 영원히 남을 거야」
요양원을 나온 그는 파리 근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라부 여관에 머물며 의사 폴 가셰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울은 가시지 않았고, 1890년 7월 27일 그는 권총으로 자기 가슴을 쏘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달려온 테오는 형이 기운을 차린 것처럼 보였지만, 몇 시간 만에 상처가 덧나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는 7월 29일 새벽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테오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은 「슬픔은 영원히 남을 거야」였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실패한 사람,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테오는 형을 잃은 슬픔 속에 여섯 달 만인 1891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고, 1914년 테오의 아내는 남편의 유해를 빈센트 곁으로 옮겨 나란히 묻었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반 고흐
운명 앱 풀이는 빈센트 반 고흐를 「태양 아래 날카로운 금속이 빛나는 것처럼, 강렬한 존재감과 정밀한 분석력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에요」라고 풉니다.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색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남의 그림을 연주자처럼 다시 해석한 데서는 「정밀한 분석력」이 보입니다. 그러나 「강렬한 존재감」은 그가 살아서 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패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죽었고, 그 빛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사람들 눈에 들어왔습니다. 날카로움이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일도 잦았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빈센트 반 고흐」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5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