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전구와 축음기로 알려진 미국의 발명가.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丁불 | 壬물 | 丁불 |
| ? | 丑소 | 寅호랑이 | 未양 |
운명 앱 풀이 — 「타오르는 듯 화려하지 않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끝까지 꺼지지 않는 촛불 같은 분이세요.」
양력 1847-02-11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2 · 흙 2 · 쇠 0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기차 위에서 판 신문
포트휴런에서 디트로이트로 달리는 기차 안에는 신문과 사탕, 채소를 파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에디슨이 처음 시작한 일은 기차를 오가며 신문과 군것질거리를 파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13세 무렵에 매주 약 50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소년은 이렇게 번 돈을 전기와 화학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사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직접 발행한 신문인 그랜드 트렁크 헤럴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신문은 지역 뉴스를 독자적으로 다루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기차에서 일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신문의 첫 번째 호를 액자에 넣어 집에 걸어두고 평생 간직했다고 합니다.
열차 충돌과 사직
온타리오주 스트랫퍼드 정션의 그랜드 트렁크 철도에서 에디슨은 밤에 일하는 전신기 업무를 맡았습니다. 전신기는 멀리 떨어진 곳에 신호를 보내는 장치인데, 그는 이 일을 하면서 물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내는 화학 공부를 하거나 화학 실험을 하고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업무 중에 다른 공부나 실험에 몰두하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주의 때문에 열차 두 대가 충돌할 뻔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고는 간신히 면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에디슨은 전신기 업무를 그만두었습니다.
마법사라 불린 연구소
에디슨은 멘로파크를 확장하여 오늘날 최초의 산업 연구소로 여겨지는 곳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멘로파크의 마법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투자와 홍보를 이끌어내며 사업을 키워 나갔습니다.
에디슨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을 쉬지 않고 일하게 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였고, 직원들도 몹시 혹독하게 부렸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18시간을 일하고 주말에도 나오는 일이 흔했습니다. 한 직원은 그 일을 「사람이 지칠 수 있는 끝」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에 더 큰 연구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밤을 밝힌 첫 실험
1882년 9월 4일, 뉴욕 맨해튼에서 전기를 공급하는 조명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에디슨의 회사는 이 시스템을 통해 946명의 고객에게 전기를 공급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시스템이 켜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빛이 너무 일정하고 사람들이 평소 사용하던 가스등과 너무 비슷해서, 스위치를 올렸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언론의 관심도 적었지만 보스턴 글로브는 에디슨이 '개막의 밤'을 맞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에디슨의 목표가 「밤을 낮처럼 밝히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장례식에 가지 않은 남편
1884년 8월 9일,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2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디슨은 일이 바쁘다며 그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평생 자식들에게도 소홀했는데, 이로 인해 자녀들과의 관계도 내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둘째 아들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받아야 했습니다.
부인을 잃은 후 에디슨은 한동안 적적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이후 두 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모스 부호는 점과 선의 신호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신 방식입니다.
불꽃놀이를 사랑한 청각 장애인
한쪽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았고 다른 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은 성인이 된 후 이러한 청각 장애가 오히려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유독 예외적인 날이 있었습니다. 바로 7월 4일 독립기념일입니다. 그는 불꽃놀이가 터질 때 나는 아주 큰 폭발음을 즐겼습니다.
그는 직접 불꽃놀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불꽃놀이 재료에 TNT를 소량 섞기도 했습니다. TNT는 폭발력이 매우 강한 화학 물질입니다.
「6개월 안에 고객을 죽일 것」
1888년 봄, 전봇대에 설치된 고전압 교류 전선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교류를 사용하는 조명 회사들이 탐욕스럽고 냉담하다며 열광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에디슨은 교류가 위험하다는 대중의 인식을 이용해 선전전을 벌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교류 반대 운동가라고 부르는 해럴드 P. 브라운과 손을 잡았습니다. 에디슨은 브라운이 대중 앞에서 교류로 동물을 감전시키는 것을 도왔고, 교류 설치와 전압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안을 지지했습니다. 이것은 훗날 「전류의 전쟁」이라 불리게 됩니다.
에디슨은 교류가 실용적이지 않으며 고전압은 너무 위험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경쟁자인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시스템을 설치하면 「죽음만큼이나 확실하게, 웨스팅하우스는 6개월 안에 고객을 죽일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에디슨은 사형 제도에는 반대했지만, 1887년부터는 웨스팅하우스의 교류를 사용하는 전기 의자가 개발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이는 교류 산업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이름을 쓰지 말라는 조건
1890년대부터 에디슨의 첫째 아들인 토머스 주니어는 가짜 약인 스네이크 오일을 비롯해 수상하고 사기적인 사업들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발명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재능이 부족했던 그는 결국 아버지와 사업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토머스 주니어는 술 문제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기도 했으며, 1899년에 시작한 결혼 생활은 1년 만에 파경을 맞이하며 본인과 에디슨에게 스캔들을 안겼습니다.
상황이 매우 악화되자 에디슨은 변호사들을 통해 아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에디슨은 아들이 에디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토머스 주니어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70톤짜리 바위 부수개
에디슨은 뉴저지주 오그덴스버그에 새로운 중앙 집중식 광산 운영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수작업에 의존해 광물을 캐던 방식에서 벗어나 자동화를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우선 거대한 바위들을 가져오기 위해 미국에서 가장 큰 증기 삽을 구입했습니다. 증기 삽은 증기의 힘으로 땅을 파서 흙이나 바위를 떠 올리는 기계입니다. 이렇게 가져온 바위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시설의 위와 아래, 그리고 가로 방향으로 이동하며 중력과 체, 그리고 여러 개의 롤러를 거쳐 미세한 광석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에서 가장 새로운 것은 전기로 돌리는 70톤짜리 롤러였습니다. 롤러의 겉면은 1분에 3,500피트(1,100미터)를 내달리는 빠르기로 돌았습니다. 바위를 떨어뜨리는 순간에는 롤러의 톱니가 풀리게 해서, 돌던 힘만으로 바위를 부수게 했습니다. 기계가 망가지지 않게 하려는 궁리였습니다. 에디슨은 사람이 철광석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것을 목표로 이 자동화 공정을 발전시켰습니다.
파산 위기의 광산 사업
1893년 미국은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이 추진하던 광산 사업은 철 가격이 떨어지면서 빠르게 손실을 보고 있었습니다. 철광석에서 인을 제거하기 위해 공기 압력을 이용한 시스템을 만들고, 운반을 위해 철광석을 덩어리로 만드는 자동화 공정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광산은 계속해서 돈을 잃어갔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업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산에 들어간 자본 투자와 더불어 아내 미나와 아이들의 생활비 부담도 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에디슨은 당뇨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몸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파산할 위험에 처한 그는 장인에게 돈을 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악보를 못 읽는 음반 사장
1900년경 에디슨의 축음기 공장에서는 1,000명의 직원이 3,000종류의 다양한 음악 레코드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축음기는 한 대에 10달러였고,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레코드에 들어갈 예술가를 결정하는 일은 에디슨이 직접 맡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모든 예술가를 하나하나 승인하며 제작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레코드에는 가수나 연주자의 이름이 적히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은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악보를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또한 그는 거의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5년까지 레코드 제작에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했습니다. 아들 찰스를 비롯한 젊은 경영진은 라디오 사업에 뛰어들거나 새로운 광고 방식을 도입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직원을 골라내는 일에 더 집중했습니다.
「엑스레이는 무섭다」
실험실에서는 엑스레이를 이용해 몸속을 들여다보는 장치인 형광 투시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조수인 클래런스 댈리와 찰스 댈리 형제는 이 실험을 위해 마치 실험용 쥐처럼 몸을 내맡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수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에디슨 본인도 시력을 거의 잃을 뻔했습니다. 클래런스는 39세의 나이에 방사선 노출과 관련된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에디슨은 이 연구를 중단했습니다. 1903년, 큰 충격을 받은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엑스레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나는 그게 무섭습니다.」
폭발하는 잠수함 배터리
1916년 1월, 미국 해군의 잠수함 USS E-2호 내부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에디슨이 사용한 니켈-철 배터리에서 수소 가스가 새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현상이었지만, 밀폐된 공간인 잠수함 안에서는 가스가 모여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다섯 명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밀러 허친슨은 에디슨의 배터리 기술이 기존의 납 배터리보다 안전한 해결책이라고 홍보해 왔습니다. 이전에는 배터리에서 유출된 황산이 바닷물과 섞여 염소 가스를 만들어내는 사고가 있어 승조원들이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수소 폭발 사고로 인해 해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에디슨과 허친슨이 배터리를 과장해서 팔았다는 비난이 나왔습니다.
사고 이후 에디슨과 허친슨은 폭발의 원인이 조작 실수 때문이라며 배터리를 방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배터리 판매는 차질을 빚게 되었지만, 해군 내에서 에디슨이 가진 명성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무를 향한 집착
1929년 말이 되어서야 마침내 결실이 나타났습니다. 에디슨은 17,000개의 식물 샘플을 테스트한 끝에 황금사철나무를 적절한 원천으로 찾아냈습니다. 이 식물의 정식 명칭은 레번워스 황금사철나무입니다. 그는 고무를 얻기 위해 식물 속의 라텍스 함유량과 추출 과정, 라텍스가 발견되는 위치, 성장 속도, 그리고 수확이 가능한지를 따져가며 체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에디슨은 이 레번워스 황금사철나무를 재배하면 12%의 라텍스 수율을 얻을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라텍스는 고무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끈적한 액체를 말합니다. 그는 자동차를 만드는 헨리 포드와 타이어를 만드는 하비 파이어스톤, 두 친구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새로운 고무 원천을 찾기 위한 식물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에디슨
운명 앱 풀이는 토머스 에디슨을 「타오르는 듯 화려하지 않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끝까지 꺼지지 않는 촛불 같은 분이세요」라고 풉니다. 17,000가지 식물을 하나씩 시험한 끝에 고무를 얻을 나무를 찾아낸 끈기는 「끝까지 꺼지지 않는 촛불」과 잘 맞습니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다」는 말은 그와 거리가 멉니다. 그는 경쟁자의 전기가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떠들며 사람들 앞에서 동물을 감전시키는 선전전을 벌였고, 불꽃놀이에 폭약을 섞어 큰 폭발음을 즐긴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토머스 에디슨」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8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