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 이산
조선 22대 임금. 규장각을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았다.
차례
| 시 | 일 | 월 | 연 |
|---|---|---|---|
| ? | 己흙 | 庚쇠 | 壬물 |
| ? | 卯토끼 | 戌개 | 申원숭이 |
운명 앱 풀이 — 「부드럽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음력 1752-09-22 (양력 1752-10-28)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0 · 흙 2 · 쇠 2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불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매달린 손자
정조의 이름은 산(祘)입니다. 1752년,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임금이었고, 아버지는 다음 임금이 될 세자였습니다.
1762년 윤5월 13일,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를 세자 자리에서 내쫓고 쌀을 담는 뒤주에 가두었습니다. 그 직전, 궁궐 무관 이석문이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문지기들을 밀치며 궐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끌려 나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숨졌습니다. 그 뒤로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랐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옷을 벗지 못하고 잔 밤들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아들을 할아버지가 있는 경희궁에 머물게 해 달라고 영조에게 청했습니다. 자신은 창덕궁에 있었으니 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습니다. 죄인으로 몰려 죽은 사람의 아들을 지키려면 그 길뿐이었습니다. 정조는 왕이 될 때까지 14년을 경희궁에서 살았습니다.
1764년, 영조는 손자를 아홉 살에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올렸습니다. 서류 위에서만이라도 「죄인의 아들」이 아니게 해, 왕위를 이을 자리를 지켜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위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를 따르던 신하들 가운데 한 무리는 세손을 없애려 했습니다. 세손은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까지 조심했습니다. 훗날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돌아보았습니다.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수가 또한 몇 달인지를 알 수 없었으니」.
1775년 봄, 여든두 살의 영조는 병이 깊어지자 세손에게 나랏일을 대신 맡겼습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들고일어났지만, 영조는 반대한 신하를 내쫓고 임금의 도장까지 세손에게 옮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손자에게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신하 하나를 두고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1
「과인」은 임금이 자기를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할아버지 영조는 손자를 일찍 죽은 다른 세자의 양아들로 올려, 죄인의 아들이라는 말을 피하게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를 스스로 꺼냈습니다.
이 말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퍼뜨리던 쪽을 정면으로 겨눈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고 이름을 높이는 일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나서야 시작했습니다.
두 번 숨어든 자객
왕이 된 이듬해인 1777년 7월, 정조가 머물던 경희궁에 괴한이 숨어들었습니다. 정조는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지만, 8월에 다시 괴한이 들어왔다가 붙잡혔습니다.
조사해 보니 정조를 몰아내고 다른 왕족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꾸민 사람들 가운데에는 정조의 외가 쪽 친척인 홍씨 집안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측근 홍국영이 사건을 맡아 관련자들을 처벌했습니다.
이 일로 즉위에 반대하던 세력은 한 해 만에 크게 꺾였습니다.
한강에 놓은 배다리
정조는 서울 밖 왕릉에 다녀올 일이 잦았습니다. 그때마다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는 배를 나란히 이어 붙여 그 위로 길을 낸 배다리를 놓았습니다.
배다리에는 나쁜 기억이 있었습니다. 앞서 연산군이 놓았던 배다리가 세곡 실은 배가 다니는 한강 물길을 오래 막는다는 원성을 샀던 것입니다. 정조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70칸짜리 창고를 지어 배다리에 쓸 재료와 장비를 넣어 두고, 쓸 때마다 꺼내 다시 썼습니다. 쓰면서 설계도 고쳐 나갔습니다. 배다리만 맡는 관청까지 따로 두었습니다.
백마를 주어 돌려보낸 측근
홍국영은 세손 시절부터 정조 곁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정조는 즉위하자 그를 비서실의 우두머리로 올리고, 임금을 지키는 호위대를 새로 만들어 그 대장까지 맡겼습니다.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정조는 그를 이렇게 감쌌습니다. 「홍국영에 있어서는 궁료로 있을 때부터 임금의 몸을 보호해와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그 믿음을 업고 홍국영은 벼슬 자리와 상소까지 쥐고 흔들었고, 전국의 관리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자기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기까지 했습니다.
1779년, 홍국영은 물러났습니다. 정조는 그를 벌하지 않고 백마와 돈을 선물로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뒤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잇따랐고, 홍국영은 강원도로 쫓겨났다가 178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가 죄에 빠진 것은 생각이 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라며 탄식했습니다.
서자를 뽑은 도서관
정조는 즉위하자 창덕궁 뒤뜰에 규장각을 세웠습니다. 겉으로는 임금의 글과 책을 모아 두는 도서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젊은 학자를 길러 자기편으로 삼는 곳이었습니다.
1779년, 정조는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네 사람을 규장각의 책 담당 관리로 앉혔습니다. 넷 모두 양반의 첩에게서 난 자식이라 벼슬길이 거의 막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조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
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면서도 뽑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행하던 새 문체를 잡스럽다며 금하고, 그렇게 글을 쓴 신하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습니다. 너그러움과 깐깐함이 한 사람 안에 같이 있었습니다.
서른 명에서 1만 8천 명으로
정조는 임금을 지키는 군대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장용영입니다. 그때까지 서울의 군영들은 임금의 외가·처가 사람들과 힘 있는 신하들 손에 있어서, 장수를 앉히는 것조차 임금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용영은 30명으로 시작해, 수원으로 본진을 옮긴 뒤에는 1만 8천 명까지 늘었습니다. 장교는 무과 시험으로 뽑았는데, 서자와 평민 출신 합격자가 많았습니다. 정조는 군사 책을 직접 짓고 훈련을 몸소 지켜보았습니다.
군사를 가르칠 책도 만들게 했습니다. 규장각의 이덕무·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가 무예를 그림과 함께 정리한 『무예도보통지』를 펴냈습니다. 1795년에는 이순신이 남긴 글을 모아 책으로 내면서, 그의 일기들에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이름은 이때 붙은 것입니다.
품삯을 받은 성 쌓기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 곁에 새 성 화성을 쌓았습니다. 1792년 초여름, 그는 젊은 학자 정약용에게 성 쌓는 데 쓸 도구를 궁리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무거운 돌을 도르래로 들어 올리는 거중기입니다.
공사에는 석수 642명을 비롯해 1만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일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백성을 공짜로 끌어다 일을 시키는 옛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일한 사람에게는 품삯을 주었고, 들어간 자재와 품삯을 모두 장부로 남겼습니다. 거중기 덕분에 돈 4만 냥을 아꼈다며 정약용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 장부는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으로 묶였습니다. 화성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크게 무너진 뒤, 1975년 복원 공사 때 이 책을 펴 놓고 옛 모습 그대로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 행차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예순 살이 되었습니다.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으로 큰 행차를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환갑을 기려 수원에서 과거 시험을 열었고, 크고 작은 신하들과 장용영 군사가 모두 따랐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길이면서, 임금의 힘을 안팎에 보이는 행차이기도 했습니다.
이 행차는 그림으로 남았습니다. 행렬을 차례대로 그린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에는 사람 1,779명과 말 779마리가 나옵니다. 앞장선 경기 관찰사 뒤를 화성 공사 책임자였던 채제공이 따릅니다.
욕설을 섞은 비밀 편지
정조는 신하들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나랏일을 움직였습니다. 지금 전하는 것만 해도 채제공, 심환지 같은 높은 신하들에게 보낸 것들입니다. 편지는 대부분 손수 써서 봉인해 비밀리에 보냈습니다.
편지에는 벼슬 자리를 누구에게 줄지, 올라온 상소를 어떻게 다룰지 같은 민감한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자기 몸이 어떤지, 신하네 집안일이 어떤지도 적었습니다. 겉으로 하는 정치와 별도로, 편지로 하는 정치가 있었던 셈입니다.
놀라운 것은 말투입니다. 새 문체를 잡스럽다며 신하들에게 반성문까지 쓰게 한 임금이, 정작 이 편지들에서는 속어와 속담, 욕설까지 거리낌 없이 썼습니다.
안경은 쓰고 천주교는 막고
정조는 서양에서 건너온 물건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이 넘어 눈이 나빠지자 안경을 썼습니다. 청나라를 거쳐 서양의 달력 계산법과 시계, 세계지도가 조선에 들어오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생각은 달리 대했습니다.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바르지 못한 학문으로 보고 물리쳤습니다. 1791년, 천주교 신자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고 어머니의 장례를 유교 방식으로 치르지 않았다가 목이 베였습니다. 한국 천주교가 첫 박해로 꼽는 일입니다.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몰래 조선에 들어온 일이 드러났습니다. 그 여파로 정조가 아끼던 정약용이 지방 벼슬로 밀려났고, 채제공도 궁지에 몰렸습니다. 새 물건은 받아들이고 새 생각은 막은 임금의 시대였습니다.
하얗게 죽은 벼
1800년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만에 얼굴과 등으로 번졌고, 피고름이 날 만큼 나빠졌습니다. 정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 견해를 담은 의학책을 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의원들의 처방을 하나하나 묻고 확인했고, 끝내 수은 김을 쐬는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미음도 넘기지 못하던 정조는 창경궁 영춘헌에서 마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바란 대로, 아버지가 묻힌 수원 곁에 묻혔습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양주와 장단 고을에서 잘 자라던 벼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었다고 합니다. 노인들은 그것을 보고 「상복을 입은 벼」라며 슬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금의 장례가 났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수은 김을 둘러싼 의심
정조가 죽자 곧 독살당한 것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근거로 꼽힌 것은 마지막 치료였습니다. 수은 김을 쐬는 치료를 하다가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의심을 키운 정황도 있었습니다. 그 치료를 주선한 신하 심환지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옳다고 보던 쪽 사람이었고, 할아버지의 왕비였던 정순왕후가 정조를 홀로 만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정조가 숨졌다는 것입니다. 심환지는 정조가 비밀 편지를 보낸 신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해 8월, 경상도 안동의 선비 장시경 형제들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집안이 처형당했습니다. 정약용도 글 속에 독살을 암시하는 대목을 남겼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때 돈 의심이고, 독살로 밝혀진 일은 아닙니다.
운명 앱으로 본 정조
운명 앱 풀이는 정조를 「부드럽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사람이에요」라고 풉니다. 처지가 막힌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고 성 쌓는 백성에게 품삯을 준 사람이, 즉위 첫날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쳐 반대편을 정면으로 겨누었습니다. 풀이와 삶이 잘 겹치는 사람입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정조」 문서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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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 —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003010_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