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869–1948

마하트마 간디

비폭력 저항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

차례
  1. 수은처럼 가만있지 못한 아이
  2. 열세 살의 신랑
  3. 어머니 앞에서 한 세 가지 약속
  4. 자기 글을 읽지 못한 수줍은 청년
  5. 피터마리츠버그 역의 긴 밤
  6. 송별회가 싸움의 자리로
  7. 지문을 찍지 않겠다는 맹세
  8. 마흔다섯의 귀향
  9. 손으로 짠 천 한 자락
  10. 바다까지 걸어가 소금을
  11. 런던 빈민가에 묵은 손님
  12. 「인도를 떠나라」
  13. 독립의 날, 물레를 돌리며
  14. 세 발의 총성
  15. 운명 앱으로 본 간디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丙불癸물己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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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앱 풀이 —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시선을 모으고, 사람들이 곁으로 모여드는 분이에요.」

양력 1869-10-02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1 · 불 2 · 흙 1 · 쇠 1 · 물 1 — 기운이 여린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나무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수은처럼 가만있지 못한 아이

마하트마 간디의 본디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입니다.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쪽 바닷가의 작은 나라 포르반다르에서 넷째이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때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포르반다르는 그 아래의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나라의 재상이었습니다. 배운 것은 많지 않았지만 일을 잘해 낸 사람이었습니다.

누나는 어린 간디를 「수은처럼 가만있지 못하고, 놀거나 쏘다니기만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개 귀를 비틀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옛이야기 속 임금 하리시찬드라는 소년의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간디는 훗날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셀 수 없이 혼자서 하리시찬드라를 흉내 냈다」고 썼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독실해서 기도 없이는 밥을 먹지 않았고, 이틀 사흘을 내리 굶는 맹세도 아무렇지 않게 지켰습니다. 간디는 어머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수줍고 말수가 적어 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라고는 책과 공부뿐이었습니다.

열세 살의 신랑

1883년 5월, 열세 살의 간디는 그 지방의 풍습대로 집안끼리 정한 열네 살 신부 카스투르바와 결혼했습니다. 형과 사촌도 같은 날 함께 결혼했습니다. 간디는 그날을 두고 「결혼이 뭔지 잘 몰라서, 우리에게는 새 옷을 입고 단것을 먹고 친척들과 노는 날일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1885년 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디는 바로 몇 분 전, 아버지의 머리맡을 떠나 아내 곁으로 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 뒤에도 그는 그 순간을 뉘우치며 글로 남겼습니다. 얼마 뒤 태어난 첫아이도 며칠 만에 숨졌습니다. 두 죽음은 열여섯 살 간디를 깊이 괴롭혔습니다.

어머니 앞에서 한 세 가지 약속

집안 친구 한 사람이 간디에게 영국 런던에서 법을 공부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내와 집을 두고 그렇게 멀리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간디는 어머니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어머니는 그제야 허락했습니다.

뭄바이에서 배를 기다리던 간디에게 같은 신분의 어른들은 영국에 가면 종교를 버리고 서양 사람처럼 먹고 마시게 될 것이라며 막아섰습니다. 간디가 어머니와의 약속을 말해도 소용없었고, 그는 끝내 자기 신분 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간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1888년 9월 4일 런던으로 떠났습니다.

자기 글을 읽지 못한 수줍은 청년

런던에서 간디는 영국 사람처럼 지내 보려고 춤까지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숙집 채식은 입에 맞지 않아 늘 배가 고팠고, 런던에 몇 곳 없던 채식 식당을 찾고서야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채식 모임에 들어가 운영진으로까지 뽑혔습니다.

모임에서 한 회원을 내쫓자는 안건이 나왔을 때, 간디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너무 수줍어서 자기 생각을 적은 종이를 직접 읽지 못했고, 다른 회원이 대신 읽어 주어야 했습니다.

1891년 6월, 스물두 살의 간디는 영국의 변호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인도로 돌아와서야 그는 어머니가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안에서 그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뭄바이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증인에게 따져 묻는 일을 도무지 해내지 못해 실패했습니다.

피터마리츠버그 역의 긴 밤

1893년, 남아프리카에서 무역을 하던 인도 상인이 간디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1년쯤 걸릴 소송이었습니다. 그해 4월, 스물세 살의 간디는 남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21년을 살게 되리라고는 몰랐습니다.

남아프리카에 닿자마자 간디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겪었습니다. 마차에서는 유럽 사람들과 함께 앉지 못하게 하고 마부 옆 바닥에 앉으라 했고, 거부하자 매를 맞았습니다. 법정에서는 머리에 두른 터번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벗지 않았습니다.

피터마리츠버그 역에서는 1등칸에서 나가라는 말을 거부했다가 기차에서 쫓겨났습니다. 간디는 역에 앉아 밤새 떨며 생각했습니다. 인도로 돌아갈 것인가, 남아서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인가. 그는 싸우는 쪽을 골랐습니다.

송별회가 싸움의 자리로

1894년 5월 소송이 끝나자, 남아프리카의 인도 사람들은 돌아가는 간디를 위해 송별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그대로 일을 꾸리는 모임으로 바뀌었습니다. 인도 사람의 투표권을 빼앗는 법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남기로 했고, 그해 인도 사람들의 단체를 세워 흩어져 있던 이들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1897년 1월, 간디가 배에서 내리자 백인 무리가 그를 덮쳤습니다. 간디는 자기를 때린 사람 누구도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간디의 생각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시절 초기의 그는 인도 사람이 흑인 아프리카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신문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겪는 차별을 다루기 시작했고, 그는 이 땅의 본디 주인은 아프리카 사람들이며 백인은 힘으로 땅을 차지했다고 썼습니다.

지문을 찍지 않겠다는 맹세

1906년, 남아프리카의 한 정부는 인도 사람과 중국 사람 모두에게 지문을 찍고 신분증을 늘 지니고 다니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관리가 언제든 신분증을 보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9월 11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큰 모임에서 간디는 이 법을 따르지 말고, 따르지 않아 받는 벌은 달게 받자고 했습니다.

간디는 이 방법을 「사티아그라하」라고 불렀습니다. 「진리를 굳게 붙든다」는 뜻으로, 폭력을 쓰지 않고 맞서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이 방법을 다듬으며 몇 번이나 감옥에 갇혔습니다. 1914년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그를 「마하트마」, 곧 「위대한 영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마흔다섯의 귀향

1915년, 마흔다섯의 간디는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1917년, 인도 동쪽 참파란의 농민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쪽빛 물감 원료가 될 작물을 억지로 심고, 정해진 값에 지주에게 팔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간디는 폭력 없는 항의로 관청의 허를 찔렀고, 농민들의 요구를 얻어 냈습니다. 인도에서 거둔 첫 큰 성과였습니다.

이듬해 홍수와 흉년이 든 지방에서는 농민들과 함께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았습니다. 땅을 빼앗기겠다는 위협에도 다섯 달을 버틴 끝에, 정부는 흉년이 끝날 때까지 세금을 늦춰 주었습니다.

손으로 짠 천 한 자락

1921년,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이끄는 단체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 물건을 사지 말자고 했고, 영국이 세운 관청과 법정도 멀리하자고 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힘을 보태지 않으면 영국의 지배는 무너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간디는 손으로 자은 실로 짠 짧은 천을 몸에 둘렀습니다. 가난한 시골 사람들과 같은 옷이었습니다. 소박한 음식을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지냈습니다. 1922년 3월 10일, 간디는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붙잡혀 6년 형을 받았습니다.

바다까지 걸어가 소금을

영국은 인도 사람들이 소금을 직접 만들지 못하게 하고 소금에 세금을 매겼습니다. 1930년 3월 12일, 간디는 이 법을 깨겠다고 밝히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388킬로미터를 걸어 4월 6일 바닷가 마을 단디에 닿았고, 바닷물로 직접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길가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았습니다.

간디는 다시 붙잡혔지만, 소금 행진은 인도 곳곳으로 번졌습니다. 영국은 적어도 6만 명을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맞섰습니다.

런던 빈민가에 묵은 손님

1931년, 간디는 영국과 인도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에 나가러 다시 런던에 갔습니다. 정부가 내준 비싼 호텔을 마다하고, 노동자들이 사는 런던 동쪽 동네의 작은 방에서 석 달을 지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의 생일에 장난감을 선물했고, 간디는 그 장난감을 고이 챙겨 인도로 가져갔습니다.

영국의 정치인 처칠은 간디를 두고 반쯤 벗은 차림으로 총독 관저 계단을 오른다며 비웃었습니다. 회의는 간디가 바라던 독립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간디는 실망한 채 돌아왔습니다.

「인도를 떠나라」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간디는 인도가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자유를 위한 전쟁에 나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1942년 뭄바이에서 그는 영국에게 「인도를 떠나라」고 요구하며, 사람들에게 「하든지, 죽든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도 폭력은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국은 곧바로 간디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건강이 크게 나빠져 1944년 5월 6일에 풀려났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죽으면 나라 전체가 들고일어날까 영국이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독립의 날, 물레를 돌리며

1947년 8월, 인도는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땅은 힌두교도가 많은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은 파키스탄으로 갈라졌습니다. 간디는 종교로 나라를 나누는 데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새 국경을 넘어 옮겨 가는 사이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졌고, 50만 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8월 15일 독립의 날, 간디는 축하 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동이 가장 심한 콜카타에서 밥을 굶으며 물레를 돌렸습니다. 서로 죽이기를 멈추라는 뜻이었습니다. 그의 단식과 호소는 폭동을 가라앉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1948년 1월에도 그는 다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마지막 단식이었습니다.

세 발의 총성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17분, 간디는 기도 모임에 나가려고 정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간디가 이슬람교도와 가깝게 지낸다며 미워하던 한 힌두교 극단주의자가 다가와 가슴에 총을 세 발 쏘았습니다. 간디는 일흔여덟이었습니다.

총리 네루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빛이 꺼졌습니다. 어디나 어둠뿐입니다.」 장례 행렬에는 100만 명이 넘게 함께 걸었고, 또 100만 명이 길가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를 화장한 자리에 세운 검은 대리석 단에는 그가 총에 맞은 뒤 남겼다는 마지막 말 「헤 람」, 곧 「오, 신이시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도는 지금도 간디의 생일 10월 2일을 공휴일로 지키고, 이날은 세계 비폭력의 날이기도 합니다.

운명 앱으로 본 간디

운명 앱 풀이는 간디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시선을 모으고, 사람들이 곁으로 모여드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바다까지 걷는 한 사람 뒤로 길가의 군중이 모여들고, 런던 빈민가의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고 찾아온 사람에게 꼭 맞는 말입니다. 다만 젊은 날의 그는 자기 글 한 장을 남 앞에서 읽지 못할 만큼 수줍었습니다. 사람을 모으는 힘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피터마리츠버그 역의 긴 밤에서부터 자라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마하트마 간디」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위키데이터 Q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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