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사주 사전 · 1917–1945

윤동주

「서시」를 쓴 시인. 일본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차례
  1. 동쪽을 밝히는 마을
  2. 사촌 형과 만든 잡지
  3. 의사 대신 문학
  4. 열아홉 편을 골랐지만
  5. 히라누마라는 이름
  6. 후쿠오카의 새벽
  7.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시집
  8. 운명 앱으로 본 윤동주
차례
운명 앱으로 계산한 사주
시일월연
?丙불壬물丁불
?午말子쥐巳뱀

운명 앱 풀이 — 「방에 들어서면 먼저 웃고 말을 열어, 자리의 공기를 바꾸는 분이에요.」

양력 1917-12-30 · 남 · 태어난 시는 기록에 없어 「?」로 둡니다

나무 0 · 불 4 · 흙 0 · 쇠 0 · 물 2 — 기운이 센 사주 · 나를 돕는 기운: 물

운명 앱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했습니다. 옛날 달력으로 적힌 생일은 지금 쓰는 달력의 날짜로 바꾼 뒤 계산합니다.

동쪽을 밝히는 마을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두만강 건너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네 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북간도는 지금의 중국 땅으로, 그 무렵 조선 사람들이 많이 옮겨 가 살던 곳입니다. 어릴 때 집에서는 그를 「해환」이라고 불렀습니다.

명동촌은 본디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1899년 함경도 사람 140여 명이 함께 옮겨 와 마을을 일구었고, 윤동주의 할아버지도 그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마을 이름은 「동쪽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명동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를 세운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었고, 아버지는 그 학교의 교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명동학교는 17년 동안 1,200명이 넘는 사람을 길러 냈지만, 1920년 일본군에게 부서지고 1925년에는 끝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사촌 형과 만든 잡지

1925년 명동소학교에 들어간 윤동주는 고모의 아들인 사촌 형 송몽규 등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1931년 열네 살에 소학교를 마쳤고,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면서 그곳의 은진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935년, 그는 소학교 동무 문익환이 다니던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옮겼습니다. 그해 10월 학생회가 펴낸 잡지에 시 「공상」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일본 신을 모신 사당에 절하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 문을 닫게 되었고, 윤동주는 문익환과 함께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의사 대신 문학

1937년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는 아들이 의학을 공부하기를 바랐습니다. 윤동주는 문학을 하고 싶어 했고, 둘은 부딪쳤습니다. 할아버지가 나서서야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가기로 정해졌습니다. 연희전문은 지금의 연세대학교입니다. 그는 1938년 4월 입학했습니다.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지내며 그는 근처를 산책하다 시를 떠올렸고, 벗들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문익환은 훗날, 신학을 공부한 자기보다 윤동주가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를 더 잘 알았다고 기억했습니다. 한 전기에 따르면 국어학자 최현배는 그의 조선어 과목에 만점을 주었다고 합니다. 1939년 2학년 때는 신문 학생란과 잡지 《소년》에 시를 실으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았습니다.

열아홉 편을 골랐지만

1940년 일본 경찰이 학생들을 더 심하게 감시하자,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하숙하며 시 쓰기에 몰두했습니다. 1941년 12월 졸업을 앞두고, 그는 틈틈이 써 둔 시 가운데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을 걱정한 교수가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원고를 정병욱에게 건넸습니다. 정병욱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게 되자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고, 어머니는 우리말로 쓴 그 시들을 항아리에 담아 집에 숨겨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히라누마라는 이름

일본에 공부하러 가려면 일본식 이름이 있어야 오가는 서류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1941년 말, 윤동주의 집안은 성을 「히라누마」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 무렵 그는 뉘우침과 슬픔을 담은 시 「참회록」을 썼습니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10월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도시샤는 그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이미 그를 「불온한 조선인」으로 점찍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후쿠오카의 새벽

1943년 7월 14일, 고향에 돌아가려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사촌 형 송몽규도 함께였습니다. 1944년 3월 31일 법원은 두 사람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판결문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민족 교육을 받아 「조선 독립의 야망」을 이루려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습니다.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열흘 뒤인 2월 2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 집에 닿았습니다. 그 뒤에야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이라는 우편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동생 윤일주는 그때 집안의 원통함이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돌아보았습니다.

감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계속 맞은 탓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죽음의 까닭은 지금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할아버지의 비석으로 마련해 두었던 흰 돌이 그의 비석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시집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윤동주의 시가 처음 신문에 실렸습니다. 1948년 그의 세 번째 기일에 맞추어, 남은 시 31편과 정지용의 머리말을 묶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습니다. 그가 살아서 내지 못한 바로 그 제목이었습니다.

1962년부터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를 찾아 훈장을 줄 때 그의 이름도 올랐지만, 가족은 사양했습니다. 그에게 독립 훈장이 내려진 것은 1990년 8월 15일이었습니다.

운명 앱으로 본 윤동주

운명 앱 풀이는 윤동주를 「방에 들어서면 먼저 웃고 말을 열어, 자리의 공기를 바꾸는 분이에요」라고 풉니다. 기록 속의 그는 혼자 산책하며 시를 떠올리고, 벗과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입니다. 그가 먼저 말을 여는 쪽이었는지는 기록이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남긴 시는 대개 조용히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쪽이어서, 풀이와는 결이 사뭇 다릅니다.

이 글은 한국어·영어 위키백과의 「윤동주」 문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생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동주」 — 출생 1917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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